이미 확정된 조건 뒤집으면 계약 위반·재산권 침해 논란
삼성·SK하이닉스 거론되며 파장···대통령실 “상황 예의주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웨이저자 TSMC 회장(오른쪽),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 =사진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웨이저자 TSMC 회장(오른쪽),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 =사진 연합뉴스.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반도체지원법(CHIPS Act)에 따라 지급된 보조금을 지분으로 회수하겠다는 구상을 띄우면서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전임 바이든 행정부가 확정한 조건을 사후 변경하는 성격이어서 국제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이 직접 거론되면서 국내 정치·외교적 부담도 커지는 양상이다.

21일 외신 등에 따르면 미 상무부는 최근 미국 내 반도체 생산거점을 확대하는 기업들의 지분을 정부가 직접 확보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인텔에 109억달러(약 15조원)를 지원하는 대신 지분 10%를 확보하겠다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삼성전자·TSMC·마이크론 등에도 동일한 방안을 적용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최근 여러 차례 공개석상에서 “미국 납세자의 돈으로 반도체 기업을 지원했으니, 지분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돌려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반복했다. 이는 단순한 경제 논리가 아니라 외국 기업을 압박하려는 정치적 메시지로 받아들여지며, 실제 정책 실행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발언이라는 해석이 뒤따른다. 미국 정부는 보조금을 ‘지원금(grant)’이 아닌 ‘투자(investment)’로 규정하며 세금 투입에 대한 이익 환수를 강조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법적 근거 없는 지분 강제는 소급입법이자 계약 조건 위반이라는 비판이 맞서고 있다. 특히 전임 행정부가 이미 확정한 조건을 뒤집는 것은 투자자 보호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지적이다.

◇“사후 변경은 계약 위반···재산권 침해 소지”

국내 대기업 사내 변호사 A씨는 “이미 지급했거나 지급 예정인 보조금 조건을 사후적으로 변경한다면 계약 위반 소지가 크다”며 “특히 신청 당시 고지되지 않은 조건을 나중에 강제하는 것은 재산권 침해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계약에는 사정 변경 조항이 있지만, 이는 극심한 안보 위기나 시장 교란 같은 긴급 상황에서만 발동될 수 있다”며 “현재 상황은 그 요건을 충족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국제통상학을 전공한 국회 입법조사처 한 관계자는 “무의결권 지분이라도 신주 발행이나 자사주 환수 방식은 기업 재무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며 “미국 정부가 지분을 보유할 경우 배당 문제뿐 아니라 경영 간섭 우려까지 따라붙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지분을 직접 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외 기업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는 사실상 국유화에 가까운 조치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했다.

◇권병규 변호사 “FTA·WTO 위반, 간접수용 소지”

법무법인 인화의 권병규 변호사(미국 변호사)는 한층 더 구체적으로 국제법적 쟁점을 짚었다. 그는 “전임 행정부에서 확정된 보조금 조건을 사후에 변경하는 것은 투자자의 정당한 기대를 훼손하는 행위로, 한미 FTA 제11.5조에 규정된 공정·공평대우(FET) 의무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며 “이미 확정된 보조금을 지분으로 받겠다고 한다면 이는 한미 FTA 제11.6조의 간접수용 조항 위반 가능성도 크다”고 지적했다.

권 변호사는 “간접수용이란 정부가 직접 몰수하지 않더라도 사실상 자산의 경제적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를 뜻한다”며 “보조금을 빌미로 기업 지분을 확보해 경영권에 간섭하는 것은 전형적인 간접수용 주장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새로운 보조금에 대해 기업이 지분 제공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경우라면 계약적 성격이 강해 국제 분쟁으로 이어지긴 어렵다”고 덧붙였다.

트럼프식 구상이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특히 외국 기업에만 엄격히 적용된다면 WTO 보조금 협정이나 FTA상 내국민대우·FET 위반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권 변호사는 “만약 미국 기업보다 한국이나 대만 기업에 더 엄격한 조건을 부과한다면 이는 WTO 내국민대우·최혜국대우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대중 수출 제한 조건과 결합할 경우 WTO 보조금협정(SCM) 제3.1조가 금지하는 사실상 수출보조금에도 해당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다만 “미국은 WTO 차원에서 국가안보 예외를, 한미 FTA에서도 안보예외조항을 주장할 수 있어 실제 분쟁이 효과적 해결책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라고 전망했다.

◇국제 분쟁 비화 가능성···실현엔 정치적 제약

전문가들은 트럼프식 구상이 현실화되려면 CHIPS법 자체 개정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현행 법률에는 지분 확보에 대한 명시적 규정이 없기 때문에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 기업 지분 확보가 현실화될 경우 주주총회 승인, 국내 규제당국 심사, 여론 반발이라는 삼중 부담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번 논란의 직접적 영향권에는 삼성전자 외에도 SK하이닉스까지 언급되고 있다. 중국 생산시설을 가진 SK하이닉스는 미국의 집중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양희 대구대학교 글로벌경영대학 경제금융통상학과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의 발언을 단순한 블러핑으로만 볼 수는 없다”며 “실제로 보조금을 지분으로 회수하는 조치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만큼 한국 정부와 기업이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구체적인 요구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입장을 밝히기는 어렵다”며 “지분 종류와 취득 방식, 미국 정부의 법적 근거 여부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대응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21일 해당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고 즉각 선을 그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한국 기업은 아직 보조금을 받은 바 없기에, 보조금 대가로 지분을 요구한다는 보도는 사실무근”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기업 측에서도 어떠한 연락이 없다”며 “확인된 바 없다가 아니라 사실무근이 맞는 표현”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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