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느리게 만들어지는 것이 있다. 전통을 지키되 머물지 않고, 동시대의 감각으로 공예를 새롭게 해석해온 브랜드의 철학과 행보를 따라가며, 그들의 유산에 깃든 장인정신을 들여다본다.
Loewe
로에베의 시작은 1846년, 스페인 마드리드의 작은 가죽공방이었다. 이곳에 1872년 독일 출신의 장인 엔리케 로에베 로스버그가 합류하며, Loewe라는 이름이 새롭게 태어났다. 그의 기술과 스페인 장인들의 독창성이 만난 로에베는 20세기 초 스페인 전역으로 뻗어나가며 유럽 럭셔리 브랜드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마드리드에 위치한 로에베의 공방은 여전히 세대를 이어 장인정신과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전수한다. 로에베는 전통을 지키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공예가 동시대 문화 속에서 지속되기를 바란다. 현대 공예 분야에서는 최초의 국제상인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공예의 가능성을 넓히며 브랜드의 공예에 관한 열정을 보여준다. 로에베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공예상 수상자는 물론, 전 세계의 예술가와 협업해 공예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바스켓, 의자, 조명 컬렉션 등을 선보이며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를 소개해 온 로에베. 2025년에는 ‘찻주전자 Tea Pot’을 주제로 25인의 예술가들이 세계의 차 문화와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을 선보였다. 한국계 도예가 제인 양 데엔(Jane Yang-D’Haene)은 주전자 표면에 도자기로 만든 리본을 붙여 찢어진 듯한 질감을 표현했고, 스페인 디자이너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Patricia Urquiola)는 사각형과 손잡이의 곡선으로 다람쥐를 형상화하며 유쾌한 디테일을 담아냈다. 오늘의 감각으로 공예를 말하는 로에베. 브랜드의 헤리티지에는 장인에 대한 존중과 공예에 대한 사랑이 스며 있다.
Hermès
에르메스 컬렉션의 아름다움은 장인이 손으로 공들여 만드는 시간에서 기인한다. 1837년 파리, 마구 용품 제작자 티에리 에르메스(Thierry Hermès)의 작은 마구 제작 공방에서 에르메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설립자 티에리 에르메스의 아들 샤를 에밀 에르메스(Charles-Émile Hermès)는 공방을 파리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로 옮기며, 귀족들을 대상으로 맞춤 마구와 안장을 제작했다. 제품의 뛰어난 품질이 입소문을 타면서 에르메스의 명성은 유럽에 널리 퍼졌다. 이후 에르메스는 남성복, 신발, 스카프 등으로 영역을 넓혔고,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에르메스는 장인정신을 보편적 가치이자 미래로 여기며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수공예와 장인정신의 가치를 지켜왔다. 2021년부터 시작된 〈에르메스 인 더 메이킹〉 전시에서도 현장에서 직접 작업을 시연하며 브랜드의 장인정신을 대중과 공유한다. 브랜드의 헤리티지는 1980년부터 출시한 홈 컬렉션에서도 이어지고, 가죽공예와 도예, 직물을 활용한 오브제들은 일상에 품격을 더한다. 공예와 장인정신을 추구하는 에르메스의 철학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과 사회적 요구를 예민하게 포착한다. 아틀리에 쁘띠 아쉬(petit h)는 그 연장선에 놓인 공방이다. 제품 제작 과정에 생겨난 자투리 가죽, 실크 등을 장인의 손길로 다시 창조한다. 에르메스는 이 실험을 통해 공예적 창조성과 지속 가능성을 탐색해, 장인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와 발맞추어 나간다.
Carl Hansen & Søn
덴마크 디자인의 유산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바로 1908년 덴마크 오덴세의 작은 가구 공방에서 시작된 칼한센앤선이다. 창립자 칼 한센과 그의 아들 홀거 한센의 이름을 따서 시작된 이 브랜드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함없이 장인정신을 고수해 왔다. 칼한센앤선의 가구는 한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된 정성과 시간을 담고 있다. 수십 년 자란 원목을 깎고 다듬고 짜맞추고, 120m 길이의 종이 끈으로 좌판을 엮어내고, 가구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수백 번의 손길이 더해진다. 그렇게 완성된 가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멋을 자아내고, 오래될수록 가치가 빛난다. 그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 바로 한스 웨그너의 ‘위시본 체어’다. 1950년 첫선을 보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산을 멈춘 적 없는 칼한센앤선의 상징 같은 작품이다. 아울러 한스 웨그너를 비롯해 보르게 모겐센, 올라 완셔, 코레 클린트 등 덴마크 디자인 거장들의 작품을 오늘까지 이어오며 디자인 유산을 지켜가고 있다. 하지만 칼한센앤선은 전통에만 머물지 않는다. FSC™ 인증을 받은 지속 가능한 원목과 친환경 도료부터 지역 난방을 지원하는 자원 순환 시스템, 장인을 키우는 교육 프로그램까지, 오래 사용할수록 더 가치 있는 가구를 만들겠다는 믿음 아래 수리와 관리 서비스를 함께 운영하며 가구의 수명을 잇고 있다. 장인의 손끝에서 시작된 100년의 전통, 그리고 그것을 오늘의 삶 속에서 새롭게 완성해 가는 디자인. 앞으로도 세월이 흐를수록 더 빛나는 가구를 통해 장인정신의 본질을 전할 것이다.
Gucci
1921년, 피렌체의 작은 가죽공방에서 첫발을 내디딘 구찌는 오늘날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승마용 장갑과 부츠, 실용적인 가죽 제품으로 시작했지만, 전통을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시대를 앞서간 창의성과 혁신이 구찌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었다. ‘최상의 전통을 최상의 품질로, 과거의 아름다움을 오늘의 삶에’는 구찌가 처음부터 지켜온 철학이자 장인정신이다. 그 정신이 가장 빛난 순간은 1947년, 대나무를 손잡이에 더한 ‘구찌 뱀부 1947’ 핸드백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전쟁으로 자원이 부족했던 시절, 구찌는 이국적인 대나무를 활용해 그동안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냈고, 뱀부는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구찌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2025년 4월, 구찌는 그 유산을 다시 꺼내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찾았다. 16세기 수도원 회랑을 배경으로 펼쳐진 〈구찌 | 뱀부 인카운터스(Gucci | Bamboo Encounters)〉 전시에서는 전 세계 7명의 아티스트가 각자의 언어로 뱀부를 새롭게 해석했다. 한국의 이시산 작가는 알루미늄이라는 현대적 재료를 통해 자연의 곡선을 재해석했고, 다른 아티스트들은 레진, 유리, 실크처럼 각기 다른 감각으로 뱀부의 새로운 얼굴을 선보였다. 뱀부가 지닌 시간의 무게와 시대를 넘어 이어져 온 상상력,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디자인의 힘을 보여주는 이번 전시는 구찌가 걸어온 여정의 또 다른 장면을 제시했다.
Bottega Veneta
‘보테가’는 이탈리아어로 ‘공방’을 뜻한다. ‘보테가 베네타’라는 브랜드명은 1966년 브랜드가 시작한 이탈리아 ‘베네토 지역의 공방’을 의미하는 것. 브랜드의 출발점에서부터 장인정신이 중심에 놓였고, 이는 지금까지도 변치 않는다. 보테가 베네타를 상징하는 인트레치아토(Intrecciato) 기법은 얇게 자른 가죽을 격자 모양으로 엮어 만드는 직조 방식이다. 장인이 한올 한올 손으로 작업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완성된 제품은 내구성이 뛰어나고 세월이 흐를수록 자연스러운 멋이 더해진다. 보테가 베네타는 로고나 화려한 장식보다는 섬세한 수공예를 강조한다. 2022년부터는 ‘수공예 인증서(Certificate of Craft)’를 도입해 장인정신을 드러내며 가치를 가시화하기도 했다. ‘보테가 포 보테가스(Bottega for Bottegas)’ 캠페인도 그 연장선에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타격을 입은 소규모 공방을 돕기 위해 시작된 이 캠페인은 전 세계의 개성 있는 공방을 조명해 왔다. 첫해에는 이탈리아의 공방을, 2022년에는 이탈리아 문화에 영감을 받아 작업하는 전 세계 공방에 집중하였으며, 2023년에는 한국 방패연 장인 리기태, 중국 목공 무형유산을 복원 및 보존하는 리우 웬후이(Liu Wenhui) 등 개성 있는 공예품을 만들어가는 공방을 선정했다. 2024년에는 베네치아와 그 인근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퍼즐 공방 ‘시뇨르 블룸(Signor Blum)’, 유리공예가 브루노 아마디(Bruno Amadi) 등 여섯 곳을 선정했다. 유리, 종이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는 장인들의 작품은 보테가 베네타의 쇼윈도를 채우며, 브랜드가 추구하는 공예의 가치와 장인정신을 보여주었다.
Van Cleef & Arpels
반클리프 아펠의 주얼리는 장인의 손끝으로 써 내려간 서사시와 같다. 1895년, 다이아몬드 세공사 알프레드 반클리프(Alfred Van Cleef)와 보석상 가문의 에스텔 아펠(Estelle Arpels)이 결혼하면서 시작된 이 주얼리 메종은, 세대를 거치며 장인들의 기술과 감수성을 쌓아왔다. 브랜드를 이끌어온 시그니처 기술인 ‘미스터리 세팅’은 반클리프 아펠의 공예적 헤리티지를 보여준다. 원석을 지지해 주는 발인 ‘프롱(Prong)’이 보이지 않도록 보석을 세팅해 표면에 끊김이 없이 이어지는 곡선을 만들어내는 기법은, 1933년 특허를 출원한 이후 지금까지도 브랜드를 대표하는 장인정신의 결정체다. 반클리프 아펠은 2012년, 보석 공예 교육기관인 에콜 데자르 조아이예(L’École des Arts Joailliers)를 설립하며 지식과 철학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고 있다. ‘엑스트라오디네리 오브제(Extraordinary Objects)’ 컬렉션은 반클리프 아펠의 공예성과 감성이 만나는 지점이다. 2025년 선보인 엑스트라오디네리 오브제 ‘플라네타리움(Planétarium)’ 오토마톤은 태양계 행성의 움직임을 자동 기계 장치로 구현해, 우주가 춤을 추듯 회전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아파리시옹 데 베(Apparition des Baies)’ 오토마톤은 나뭇잎이 겹겹이 포개진 오브제 속에서 새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담아냈다. 정교하게 채색한 126장의 잎, 손으로 세팅한 보석은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CC-Tapis
공간을 위한 오브제를 넘어 바닥 위에 펼쳐지는 예술, 씨씨-타피스는 전통공예의 가치를 오늘의 디자인 언어로 풀어내는 이탈리아 럭셔리 러그 브랜드다. 밀라노를 기반으로 러그를 단순한 장식이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해 온 씨씨-타피스의 이야기는 2001년, 캘리포니아의 작은 거리에서 시작됐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티베트산 러그 한 점이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겼고, 그 순간을 잊지 못한 넬시야 참자데와 파브리치오 칸토니 부부는 전통 러그 제작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품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여정은 디자인의 도시 밀라노로 이어졌고, 아트 디렉터 다니엘레 로라가 합류하며 브랜드는 자신만의 색을 조금씩 더 또렷하게 채워갔다. 씨씨-타피스가 지키는 가장 큰 가치는 시간과 손끝에서 피어나는 장인정신에 대한 존중이다. 네팔 장인들의 수개월에 걸친 정성이 담긴 수제 러그는 그 자체로 시간이 만든 예술이며, 여기에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 마르티노 감페르, 페이 투굿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손길이 더해지며 러그는 공간에 이야기를 더하는 특별한 오브제가 되었다. 2025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열린〈웨이즈 오브 시잉(WAYS OF SEEING)〉과〈하이퍼코드(HYPERCODE)〉전시는 전통과 기술이 얼마나 아름답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로보틱 터프팅과 AR 기술을 더했지만, 시작과 끝에는 여전히 장인의 손이 있었다. 기술이 공예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 그 가치를 더 깊고 넓게 확장하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Royal Copenhagen
도자기의 역사를 새로 쓴 이름, 로얄코펜하겐. 177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시작된 로얄코펜하겐은 250년 넘게 전통 도자기 제작 기술을 이어오며, 일상 가장 가까이에서 예술의 가치를 완성해 왔다. 단순한 기물이 아닌, 쓰임과 아름다움을 모두 담은 작품으로서의 도자기는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남아 오늘도 우리의 일상을 더 아름답게 채운다. 덴마크 왕실의 후원으로 탄생한 로얄코펜하겐은 블루 플루티드 패턴과 3개의 물결 문양을 브랜드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 물결처럼 이어진 장인정신은 오늘날에도 도자기 한 점, 한 점에 담긴다. 점토 성형, 수작업 채색, 유약 도포, 1400℃ 고온 소성까지. 최대 30명의 장인이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완성하는 한 장의 플레이트에는 762번의 붓 터치가, ‘플로라 다니카’에는 1000번 이상의 정성이 더해진다. 최소 4년간의 수습을 마친 도자기 화가만이 자신의 이름을 작품에 남길 수 있으며, 그렇게 완성된 도자기는 하나의 예술이 된다. 최근 열린 250주년 기념 전시〈스틸 메이킹 웨이브(Still Making Waves)〉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바다의 신비를 담은 ‘블루 피시’, 선사시대의 토템에서 영감을 얻은 ‘토템’처럼, 유산과 감각이 어우러진 작품들은 로얄코펜하겐의 전통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말해준다. 로얄코펜하겐은 앞으로도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아름다움을 지키며, 일상 속 가장 특별한 예술을 완성해 갈 것이다.
editor 김소연·신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