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건조된 DALI호, 2024년 美 다리 들이받고 6명 사망
사고 1년5개월 뒤 손배소···“신호선 삽입 깊이 부족이 정전 유발” 주장
복구 비용 8000억원대 추산···'설계 단계 결함 vs 유지관리 책임'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2024년 3월 26일 새벽, HD현대중공업이 2015년 건조한 컨테이너선 DALI호가 미국 볼티모어항을 출항하던 중 프랜시스 스콧 키 대교 중앙 기둥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교량이 붕괴됐고, 다리 위에서 작업 중이던 인부 6명이 강으로 추락해 숨졌다. 당시 선박은 지정된 항로를 따라 운항 중이었으며, 항법 장비나 추진 장치에서 별다른 이상 징후는 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조종이 불가능해졌고, 추진력을 상실한 채 충돌로 이어졌다. 정전의 정확한 원인을 둘러싼 의문은 계속됐다.
◇사고 1년5개월 뒤 제기된 소송···“설계결함이 정전 유발”
사고 발생 1년5개월 뒤인 2025년 7월29일, 선박 소유사 GRACE OCEAN과 운항사 SYNERGY MARINE은 HD현대중공업을 상대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동부지방법원에 민사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시사저널e가 입수한 소장에 따르면, 원고 측은 HD현대가 설계한 스위치보드(Switchboard)에 구조적 결함이 존재했고 그로 인해 선박이 정전을 겪으며 조종 불능에 빠져 결국 교량 충돌 사고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원문: “As a result of the defectively designed Switchboard, the Vessel suffered a power outage that led to the allision with the Key Bridge.”)
스위치보드는 선박의 주요 전기 장비에 전력을 공급하는 분배 장치다. 전기 추진력, 계기 시스템 등 선박 운항 전반을 뒷받침하는 핵심 설비로 꼽힌다.
소장에는 특히 “신호선 말단에 부착된 라벨링 밴드(Labeling Band)가 금속 슬리브(ferrule)에 지나치게 근접해 배치되면서, 와이어의 삽입 깊이를 제한했고, 이로 인해 터미널 블록에서 안정적인 접촉이 형성되지 못했다”는 기술적 설명이 담겼다.
(원문 : The signal wire was not securely connected to the terminal block because the labeling band identifying the wire was installed too close to the ferrule crimped on the end of the wire.)
아울러 원고 측은 이 같은 결함이 설계 단계부터 내재 돼 있었으며, 결함 있는 제조 구조로 인해 정상 운항 중 신호 전선이 느슨해졌고, 이로 인해 전력 손실이 발생하며 충돌 사고로 이어졌다고 구조적 취약성을 지적했다.
(원문 : defectively manufactured the Switchboard and Vessel by failing to ensure that all wires were securely connected to their terminal blocks...which manufacturing defect made the Switchboard and Vessel unreasonably dangerous...resulting in the power outage that led to the allision.)
◇NTSB 실험 결과, "접점 불량 가능성 확인"
원고 측의 주장은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 산하 재료실험실(Materials Laboratory)이 실시한 스위치보드 단자 블록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NTSB는 사고 직후 DALI호의 해당 부품을 분해해 디지털 현미경 및 실물 촬영 장비를 통해 접촉 상태를 분석했고, 그 결과는 2024년 6월 ‘Engineering – Materials Laboratory Factual Report’라는 제목으로 공식 보고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문제의 신호선은 충분한 깊이로 삽입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해당 단자 블록에서 “전기 접점이 형성됐던 금속 표면에 긁힘 자국과 금속 이송 흔적(material transfer)이 존재했다”고 명시돼 있다.
NTSB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The ferrule on wire 1 was positioned with the depression on the end of the ferrule in-line with the spring clamp gate edge.”
“Wire insertion depth was limited due to the still assembled labeling band restricting movement into the connection.”
이는 신호선 말단에 부착된 라벨링 밴드가 와이어의 삽입을 물리적으로 방해해, 해당 신호선이 충분히 깊이 꽂히지 못했고 결국 접촉 불량을 유발했다는 구조적 결함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또한 NTSB 실험에서 확보된 단자 블록의 접촉면에는 접촉 불량을 암시하는 미세한 금속 손상 흔적이 관찰된 것으로 확인된다.
◇교량 복구비만 8000억원···현대重, ‘유지보수 과실’ 반박 논리 제시할 듯
소장에는 “손해액은 향후 재판을 통해 확정된다”(The amount of damages will be determined at trial)고만 명시돼 있다. 청구 내용은 ▲선박의 물리적 손상에 대한 수리 및 교체비용 ▲청구인들이 입은 모든 손해에 대한 구상 또는 면책 ▲이자 및 법원 비용 ▲변호사 비용 ▲정당하게 받을 자격이 있는 기타 모든 손해 등이다.
미 교통당국은 프랜시스 스콧 키 대교 복구 비용만 약 6억달러(한화 약 8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여기에 선박 손상, 보험금 청구, 항만 운항 차질, 화물 손해 등 간접 피해까지 고려하면 HD현대중공업이 부담할 잠재적 배상 책임은 수천억원대에 이를 가능성이 제기된다.
하지만 DALI호는 2015년 건조된 이후 약 9년간 특별한 사고 없이 정상 운항해온 선박이다. 이 점을 근거로 HD현대 측은 설계결함이 아닌, 유지보수 관리상의 과실이나 정비 중 이뤄진 비표준 설치 행위일 가능성을 반박 논리로 제시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해당 라벨링 밴드가 최초 설계 당시부터 고정돼 있었는지, 이후 정비나 교체 과정에서 잘못 삽입됐는지 여부는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NTSB 역시 사고 원인을 ‘설계 결함 또는 기타 요인’(design flaw or other issue)으로 분석하며, 접점 불량의 원인이 설계상 결함이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시사했다.
이번 소송은 선박 사고에 대한 조선소의 설계책임이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수 있다. 소장은 제조물책임(product liability), 과실(negligence), 묵시적 보증 위반 등 6가지 법적 근거를 들어 HD현대의 책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관련 민사 책임 범위는 미국 연방법과 각 주의 불법행위법(Tort Law) 적용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제조물책임 소송에 정통한 한 변호사는 “설계 단계에서의 결함 및 사전 방지 가능성과 유지관리 책임 사이의 경계가 핵심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