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부위원장 "위험가중치 조정하겠다"···업계 "무리수"
금융위 해체 위기···"대통령 의중 맞추기 위한 발언" 해석도
[시사저널e=유길연 기자]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은행의 기업대출에 대한 위험가중치(RWA)를 조정할 것을 시사하면서 논란이다. 위험가중치는 그간 쌓은 은행권 데이터를 기반으로 산출한 값인데, 이를 자의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는 우려가 나온다. 자칫하면 은행의 건전성이 크게 악화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단 지적이다.
일각에선 권 부위원장이 해체 위기에 직면한 금융위를 살리기 위해 무리한 발언을 한 것 아니냔 추측도 나온다.
◇ “경험적 데이터로 산출한 건데”···위험가중치 바꾸겠단 권 부위원장
1일 금융권에 따르면 권 부위원장은 최근 각 금융업권 협회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시대 여건에 맞지 않는 위험가중치 등 건전성 규제를 포함해 전반적인 업권별 규제를 살펴보아 조속히 개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은행에 적용되는 국제결제은행(BIS)자기자본비율 규제를 수정해 은행이 기업대출, 기업 지분 투자 등 '생산적 금융'을 늘리도록 하겠단 것이다.
그런데 권 위원장의 발언은 부적절하단 비판이 나온다. 위험가중치는 그간 은행에서 쌓아온 데이터를 기반으로 각 대출의 부도확률(PD), 부도시 손실률(LGD), 부도시 익스포저(EAD) 등을 추정해 산출한 값이다. 이를 생산적 금융을 활성화한단 의도 아래 자의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단 것이다. 더구나 BIS비율 제도는 국제 기준이기에 이를 함부로 변경하면 국가의 대외신인도에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기업대출에 대한 위험가중치를 낮추면 은행의 건전성이 크게 악화될 수 있는 점이 문제다. 은행들이 당국의 조치로 중소기업 대출을 대거 늘릴 경우 향후 경기가 더 침체되면 연체율이 치솟고 부실등급 채권이 크게 불어날 수 있다. 더구나 부실화된 대출의 위험가중치가 낮게 처리됐단 것이 드러나면 은행에 대한 신뢰가 악화돼 최악의 경우 ‘뱅크런’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위험가중치는 객관적인 기준 아래서 산출되는 것인데, 이걸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할 것이 어디 있나”라면서 “실제로 당국이 위험가중치를 조정하면 이는 한국이 금융 후진국이라고 자인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최근 은행권의 자금이 기업으로 잘 흘러가지 않고 있단 비판이 잇달아 제기된다. 은행이 주택담보대출 등 개인대출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BIS자기자본비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BIS자기자본비율은 은행이 예상치 못한 손실에 대비할 만한 능력을 측정하는 지표다. 분자는 자기자본, 분모는 위험가중자산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위험가중자산은 은행이 보유한 자산에 각 자산 별 부실가능성에 따라 산출한 위험가중치를 곱해 산출한 값이다. 위험가중치가 높은 자산을 늘리면 그만큼 분모인 위험가중자산이 늘어나 BIS비율이 하락한다. 은행은 BIS비율이 당국이 권고한 수준 이상이 되도록 관리하면서 사업을 진행한다.
은행이 보유한 자산 가운데 위험가중치가 낮은 것은 보통 주택담보대출 등 담보가 있는 개인 대출이다. 반면 기업대출의 경우 위험가중치가 주담대 보다 더 높다. 지난 금융당국에 따르면 2022년 국내 은행이 주담대에 적용한 위험가중치의 평균은 15.2%인데 반해 중소기업 대출은 평균 45.5%로 세 배 가까이 높았다. 신용대출을 포함한 개인대출 전체 평균치도 중소기업 대출 대비 약 20%포인트 낮은 28.8%였다.
은행이 BIS비율 제도가 도입된 이후 주담대 판매에 집중하고, 기업대출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다. 더구나 지난해엔 정부의 정책으로 은행의 모기업인 금융지주가 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밸류업)을 가동한 탓에 은행의 기업대출 기피 현상은 더욱 심화됐다. 금융지주가 자본 유출 요인인 배당과 자사주 매입 규모를 늘리려면 BIS비율을 더욱 보수적으로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국이 위험가중치를 조정하려고 하는 이유다. 하지만 생산적 금융을 위해서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은 문제란 지적이다.
◇ ‘해체위기’ 금융위 살리기 위한 무리수?
일각에선 권 부위원장이 ‘무리수’를 던지는 진짜 이유는 ‘금융위 조직 지키기’에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의 이번 발언은 이전까지 당국이 보였던 태도를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험가중치 조정 논의는 올해 초부터 시작됐다. 당시에도 당국은 생산적 금융을 활성화한다는 목표 아래 기업대출과 기업 지분 투자에 대한 위험가중치를 낮추기 위해 테스크포스(TF)도 구성했다. 하지만 이후에 당국은 초반 기세와는 달리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위험가중치를 조정할 만한 마땅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 부위원장이 이번에 다시 이 사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단 뜻을 보인 것이다.
새 정부는 금융위를 사실상 해체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국정기획위원회는 이재명 정부 집권 초부터 금융위의 금융정책 기능을 기획재정부로 이관하고 금융감독기능은 금융감독원과 합쳐 금융감독위원회로 개편하는 내용을 포함한 법안을 제시했고, 최근 최종안을 내놓았다. 대통령이 이를 승인하고 국회를 통과하면 금융위는 사라지는 것이다.
이에 권 부위원장은 최대한 대통령의 의중에 부합하는 움직임을 보여 조직을 살리려고 했단 것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생산적 금융을 활성화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국민경제 파이를 키우려면 금융기관도 건전한 투자에 나서야 한다"며 "주담대만 확대하는 '이자 놀이'에 매달릴 순 없다"고 언급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생산적 금융을 하려면 위험가중치를 조정할 게 아니라, 미국처럼 대출자산을 유동화하는 증권을 발행해 자본시장이 이를 소화하도록 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라면서 “금융위는 매번 정치권 눈치 보느라 바빠 근본적인 정책을 내놓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