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간 4대 그룹 중 혁신 멈춘 기업 사실상 삼성 뿐
조직개편으로 자신감 드러낼지 주목
[시사저널e=엄민우 IT전자부장] 대한민국 역사상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만큼 긴 시간동안 법적 리스크를 겪은 경영자가 또 있을까 싶다. 예전 기업 총수들은 교도소 담벼락 위를 걷다시피 하며 경영을 했다지만, 사실상 승계와 동시에 교도소와 법원을 들락날락했던 이 회장만큼 시달리진 않았다. 이 회장은 최근 사법 족쇄를 풀기 전까지 분식회계 의혹 및 국정농단 사태 등으로 약 10년의 세월을 재판과 함께 보냈다. 투입된 대한민국 최고의 변호사들에게 들어간 돈만 해도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이 회장에게 더욱 큰 손실은 변호사 비용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다. 하필 지난 10년은 반도체 시장을 비롯해 글로벌 산업계가 요동쳤던 시간이었다. 엔비디아가 떠올랐고 젠슨 황이라는 가죽쟈켓의 스타 CEO가 탄생했다. 이 회장 또래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그간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하고 로봇, 자율주행, 전기차로 기술 영역을 넓혀 나갔다. SK하이닉스는 오래전부터 공들인 D램시장의 게임 체인져 HBM의 선두주자가 돼 역대 최대실적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LG전자는 ‘만년적자’ 스마트폰 사업을 정리하고 AI 파운데이션 부문에서 내실을 다져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냉정히 말해 지난 10년 간 4대 그룹 중 ‘혁신의 영역’에서 사실상 정체하다시피 한 곳은 삼성전자뿐이다.
이 회장이 사법리스크를 겪는 동안 세간에서는 ‘역시 그래도 삼성은 잘 짜여진 시스템이 있어 돌아간다’고 해석해왔다. 그런데 말 그대로 ‘돌아가기만’ 했다. 눈에 띄는 조직개편, 주주와 시장에 감동을 주는 혁신은 찾을 수 없었다. 일각에선 삼성의 위기와 이 회장의 사법리스크가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삼성을 잘 알고 사심없이 분석하는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회장의 불안정한 상황이 삼성의 위기와 연관 있다고 본다. 이 회장을 두둔하자는 것이 아니다. 강력한 리더십을 오롯이 발휘하기엔 힘든 조건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위기를 취재하며 조직 내외부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일치했는데 정리하면 ▲연구개발에 있어 자연스러운 실패를 용납치 않는 회사 분위기속에 도전하지 못하는 풍토가 퍼져갔고 ▲관료출신들이 영입되며 경직된 분위기가 형성됐으며 ▲자리 지키기에 연연하느라 자금만 틀어쥐는 고위임원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죄절감을 느낀 삼성전자 엔지니어들에게 국내외 경쟁사 러브콜이 이어지며 인력유출 문제도 심각해졌다.
사법리스크에서 벗어난 이 회장 앞에는 이처럼 신음하는 삼성전자가 놓여있다. 삼성전자는 유독 외부에 사공(沙工)이 많다. 주식을 일부 들고 있다는 이유로, 혹은 기업을 감시하겠다는 이유로, 표를 얻겠단 이유 등으로 한마디씩 쉽게 던지지만 누구도 삼성전자와 운명을 같이 하거나 책임은 지지 않는다. 결국 수술칼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단 한 명, 이 회장뿐이다.
조직에 변화를 주는 것이 시작이다. 최근 몇 년 새 조직개편은 다소 소극적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여전히 국내외 여건이 만만치 않지만, 더 이상 이 회장이 눈치보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은 만들어졌다. 때마침 삼성전자가 테슬라와 22조8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파운드리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시장의 기대감도 한껏 커진 상황이다.
일단 디자인 총괄사장직에 외국인을 영입하는 등 올해 들어 글로벌 인재 영입에 공을 들이는 것에 대해 작지만 의미 있는 행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의선 회장이 현대차의 체질을 바꾼 시발점도 내부 반발을 무릅쓰고 실력 있는 외부 인사들을 주요 자리에 앉히는 것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재용의 시간은 재판이 끝난다고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이 회장이 자신감 있게 제대로 힘을 쓸 줄 알아야 찾아오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