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국회, 법정 기금 벤처투자 비율 의무화 검토
고물가·투자 위축 상황 속 ‘마중물’ 역할 기대감
예측 가능성 높이는 생태계 전략 설계 힘 쏟아야
[시사저널e=이창원 기자] 최근 정부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벤처·스타트업 생태계 회복을 위한 법정 기금의 벤처투자 확대 관련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고금리, 투자 위축·경색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벤처·스타트업 업계에서는 공공 자본이 시장 유동성의 마중물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단순한 자금 공급만으로는 생태계 회복이 어려울 수 있다는 회의적인 시선도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법정 기금에서 벤처투자 비율을 의무화하는 것도 정책 아이디어로 고려할 수 있다”며 “필요하다면 정부가 직접 투자에 나설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정책금융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보다 적극적인 공공 자본 투입을 검토하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국회에서도 ‘국가재정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되며 관련 논의에 불씨를 지폈다. 박정·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해당 법안의 주 골자는 ▲정부·공공기관이 운용하는 법정 기금 여유자금의 일정 비율(3~5%) 이상을 벤처·창업 기업 투자에 사용 ▲벤처·창업 기업 투자 사용 실적 국회 보고 등이다.
이와 같은 정부와 국회의 움직임에 특히 초기 투자 절벽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공공자금의 유입이 최소한의 버팀목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업계에서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가 관측된다.
AI 솔루션을 개발 중인 한 스타트업 대표는 “투자 유치가 지연되면서 팀원 절반이 회사를 떠났고, 제품 개발도 중단됐다”며 “기술력이나 성장성보다 수익화 여부만을 묻는 투자자들이 늘었다. 지금은 회사를 운영한다기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VC(벤처캐피탈) 관계자 또한 “법정 기금 여유자금이 연간 수십조 원에 달하는 만큼 그 가운데 일부만이라도 벤처·스타트업 시장에 흘러들면 유의미한 생태계 회복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법정 기금은 국민연금기금, 고용보험기금, 산업기반기금 등 공공재원을 기반으로 한다. 업계에서는 기금의 1~2%만 벤처 투자에 활용되더라도 연간 약 10조원 수준의 공공 모험자본 공급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 정부 모태펀드 자펀드의 연 수익률이 20%를 상회하는 경우도 있는 만큼 고수익을 목표로 하는 기금에는 적절한 운용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법정 기금은 국민의 자산이자 사회안전망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에 고위험 투자에 따른 손실 책임, 운용 투명성 확보, 정치적 개입 우려 등도 주요 고려 사항이다.
정부 관계자는 “기금 운용의 기본 원칙은 안정성과 공공성”이라며 “현재 단계에서는 고수익을 노리는 과감한 투자보다는 기존 정책 펀드와의 연계, 점진적 확대 등을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법정 기금 투입이 단기 유동성 공급 차원에서는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스타트업 생태계의 체질 개선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VC 관계자는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더 시급한 건 회수시장의 정상화와 민간의 위험 감수 유인”이라며 “자금 공급뿐 아니라 기업공개(IPO) 요건 완화, 인수합병(M&A) 촉진, 세제 인센티브 확대 등 종합적 생태계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지역·산업 맞춤형 투자 플랫폼, 기술 기반 창업기업에 대한 공공 조달 연계 등도 함께 추진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법정 기금 투자 확대는 분명 현재 벤처·스타트업 시장에 단기적인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수단으로 보인다. 다만, 공공자금 투입이 마중물은 될 수 있지만, 민간 자본과 회수 인프라가 작동하지 않으면 결국 물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인 듯하다.
정부와 정치권은 현재 논의 중인 법 개정과 기금 운용 정책을 단지 ‘돈을 푸는 정책’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위험 감수 구조를 정비하고,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생태계 전략 설계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벤처·스타트업 시장은 자금보다 ‘환경’을 통해 살아남기 때문이다.
투자는 숫자 이전에 신호다. 시장에 필요한 것은 ‘기회는 여전히 있다’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