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건 증거에 1시간 넘게 부동의 반복···본인 제출 증거·언론 기사도 부동의
재판부 “조작 아니라면 증거는 동의해야”···검찰 “방어권 범위 내” 대응 자제
가상자산 이용한 96억 비자금 조성 혐의···차남은 징역형 확정돼 복역 중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가상자산을 이용한 비자금 조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상철 한컴그룹 회장이 대법원 판례와 언론 기사, 자신의 변호인이 제출한 이메일 등 다수 증거에 증거 부동의 입장을 밝히며 검찰과 신경전을 벌였다. 재판부는 “대법관이나 기자들을 다 증인으로 부를 순 없다”며 여러 차례 증거입장 정리를 촉구했다.
15일 수원지법 성남지원 형사1부(재판장 허용구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김 회장의 특경법상 배임 혐의 2차 공판기일에서, 김 회장의 변호인은 검찰이 제출한 2300건의 증거목록에 대해 순번을 일일이 읽으며 1시간가량 ‘증거 부동의’ 입장을 반복했다. 대상에는 검찰 수사보고서와 참고인 진술조서, 녹취록은 물론 대법원 판례와 언론 보도자료, 언론 기사, 변호인이 검찰에 제출한 증거까지 포함됐다. 변호인은 김 회장 자신의 피의자 신문조서에 대해서도 “내용은 인정하지 않는다”며 입증취지 부인 의사를 표시했다,
형사재판에서 ‘증거부동의’는 검찰이 제출한 서류나 조서의 진정성을 다투며, 증거로 사용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 절차다. 검찰이 이를 입증하지 않으면 해당 자료는 증거로 채택될 수 없고, 입증 과정에서 증인신문 등 절차가 추가되면서 재판이 길어질 수 있다.
재판부는 김 회장 측의 반복적 부동의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허 부장판사는 “대법원 판결도 부동의 하겠다는 건데, 그럼 대법관을 증인으로 부르겠다는 것이냐”며 “검찰이 발송한 사전처분 통지서는 공문서인데, 그것도 인정 못 하겠다는 건가. 입증취지 부인으로 정리하라”고 말했다.
이어 “자신의 변호사가 제출한 서류까지 부동의 하겠다는 게 맞느냐”며 “‘수정합니다’, ‘번복합니다’ 계속하면 재판만 길어진다. 진정성립 여부를 애초에 명확히 하라”고 질책했다. 녹취서와 관련해서는 “녹음된 걸 그대로 옮긴 것이라면 성립은 인정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입증취지로 다퉈야 한다”며 “캡처 이미지도 원본이 조작된 게 아니라면 증거는 인정하고, 다툴 부분은 입증취지 부인으로 정리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변호인의 증거부동의 의사를 계속 확인하면서도, ‘입증취지 부인으로 입장을 변경하도록 요청했다’는 점을 조서에 기재하도록 했다. 변호인은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검찰 관계자는 “김 회장 측의 증거 부동의가 재판 지연 전략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형사소송법상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 범위에 해당하는 사안”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날 공판에서는 증인신문 절차에 대한 논의도 진행됐다. 검찰은 총 34명을 증인으로 신청했으나, 재판부는 핵심 증인 5명만 먼저 채택해 신문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아울러 “증인신문을 위해 한 명당 5시간, 6시간을 사용하는 건 비효율적”이라며 “검찰과 변호인 모두 핵심 쟁점 위주로 신문 사항을 정리하고, 증인 1인당 신문시간은 최대 3시간 이내로 제한하겠다”고 정리했다.
김 회장은 2021년 12월부터 2022년 10월까지 회사가 보유한 가상자산 ‘아로와나토큰’을 사업상 필요에 따른 것처럼 위장한 뒤 매각해 취득한 비트코인 약 96억원어치를 사적으로 유용한 혐의로 지난 4월 23일 불구속기소됐다. 이 외에도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차명주식 취득 및 허위급여 명목으로 계열사 자금 2억5000만원과 2억4000만원 상당을 각각 임의 사용한 혐의(업무상 횡령)도 받고 있다.
이 사건과 별도로 김 회장은 2019~2020년 주식 소유 변동사항을 금융당국에 제대로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 올해 1월 자본시장법 위반으로 불구속기소됐으며, 지난 4월 수원지법 성남지원 1심에서 벌금 2000만원을 선고받고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한편 김 회장의 차남은 관련 사건으로 올해 1월 징역형이 확정돼 현재 복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