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태평양은 비즈니스 관점에서 보면 쓸모없는 차디찬 바다다. 북태평양에 치우쳐 있는 한국에게는 더없이 불리하다. 하지만, 상황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글로벌 비즈니스로 활기 넘치는 바다가 될 수 있다. 한국, 미국, 러시아, 캐나다, 일본이 참여하는 ‘북태평양 경제블록’ 탄생 가능성 때문이다. 이것은 북극항로 개설과 무관하다. 그리고 한·러 경제 관계 복원 수준의 이야기도 아니다. 지구상에 없던 엄청난 규모의 경제블록 형성과 한국이 핵심 국가로 부상하는 것과 관련 있다.
북태평양 경제블록 가능성은 여기에 속할 국가들의 니즈가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이 기존 경제블록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유로(Euro) 블록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유럽이 미국을 경제적으로 수탈하고 있다고 여겨서다. 이런 인식의 증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관세협상을 하면서 미국은 유럽을 일관되게 푸대접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탈퇴하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유럽과 가졌던 NATO 회의에서 유럽이 꺼리던 GDP 대비 5% 국방비 지출 약속을 윽박지르듯 받아 냈다.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인 아세안은 미국이 끼어들기 너무 협소하다. 중동의 아랍연맹은 미국에게 종교적으로 이질적이다. 또 중국의 일대일로 경제블록에 대해서는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북태평양 경제블록 가능성과 관련해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의 글로벌 전략 변경이다. 과거 미국은 유럽과의 협력에 초점을 둔 대서양 전략에 충실했다. 하지만, 최근 미국은 대서양이 아닌 인도-태평양(인·태)을 중시하는 전략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국가 간 연합을 의미한다. 이 전략은 2016년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제안한 후 2017년 미국이 채택한 것이다. 이에 의거 미국, 일본, 호주, 인도 간 외교, 안보, 경제 협의체인 4개국 안보회의(QUAD)가 탄생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인·태 전략에 적극적이다. 1기 트럼프 정부에서뿐만 아니라 2기 정부에서도 미 정부의 핵심 전략으로 유지하고 있다. 이것의 핵심은 인도양과 태평양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약점이 있다. 참여국들의 이질성으로 인한 이해 상충, 중국의 반발, 이 전략으로 얻을 경제적 이익의 불확실성 등이다. 이를 보완할 방법으로 적합한 것이 북태평양에 접한 부국들을 연합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런 시각을 가지기 어려웠다. 북태평양 연안국 간의 이해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미·러는 이념적으로 대립했다. 러·일은 영토분쟁 등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았다. 한·일 관계도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미·러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우선, 트럼프가 미·러 협력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는 러시아와 협력해서 얻을 이익에 기대가 많다. 러·우 전쟁 종식을 위한 푸틴과의 통화(2025년 3월 18일)에서 미·러 관계 개선이 양국에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줄 것이라는 발언을 하였다. 당장, 북극해 자원을 공동개발할 경우 그 이익은 천문학적이다. 러시아에 묻힌 희토류를 개발할 수 있다면 중국의 희토류 위협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기술적, 관세적 위협에도 버티고 있는 중국을 러시아와 분리해 고립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틈만 나면 러시아를 띄워주고 있다. 2025. 6. 16~17일 캐나다에서 있었던 G7 정상회의에서도 러시아를 두둔했다. 그는 G8의 회원이었던 러시아를 크림반도 합병 후 모임에서 축출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주장하며, 러시아가 이 모임에 남아 있었다면 2022년 러·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더는 미국과의 이념적 대립이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안다. 러·우 전쟁으로 채워진 경제족쇄를 풀려면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런 푸틴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2025. 6. 23일, 이란 외무장관 아바스 아라그치는 모스크바에서 푸틴을 만나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파괴된 러시아산 방공망 수리와 핵시설 복구 지원요청을 하였다. 하지만, 푸틴은 립 서비스만 하였을 뿐 구체적 지원 약속을 하지 않았다.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증거다. 미·러가 가까워지면 나머지 국가는 뭉치기 쉽다. 러시아는 한국과 경제교류를 강화하고 싶어 한다. 극동지역 개발에 최적의 국가가 한국임을 알고 있어서다. 일본도 북태평양 경제블록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와의 영토분쟁을 풀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캐나다 역시 이 블록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캐나다산 가스와 석유를 한국과 일본에 판매할 수 있으면 미국 종속적 경제를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국가가 뭉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북태평양 인접국들이 중국견제 필요성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을 강력하게 견제하고 있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러시아도 내심 중국이 불편하다. 한국과 일본도 다르지 않다.
북태평양 경제블록이 형성되면 그 시장규모가 엄청나다. GDP 규모로 살펴볼 때, 이 지역 국가의 2024년 GDP는 미국 29.2조, 일본 3.9조, 러시아 2.2조, 캐나다 2.2조, 한국 1.9조 달러다. 합치면 39.4조 달러다. 유럽연합 27개국 2024년 총 GDP 18.7조 달러의 두 배가 넘는다. 미국을 제외해도 10.3조 달러로, 유럽연합에 못지않은 경제블록이 형성된다. 이는 미국이 바라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국이 모인 경제블록의 수장이 될 수 있고, 미국의 꽉 막힌 경제의 활로를 뚫을 수 있으며, 중국과의 탈동조화(Decoupling)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태평양 경제블록 형성으로 한국이 볼 이득은 엄청나다. 지긋지긋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한국은 중국이 남중국해를 막으면 에너지 수입이 불가능하다. 새로운 경제블록은 한국의 에너지 파탄을 막아줄 방어막이다. 미국은 알래스카 가스개발에 한국의 참여를 요청하고 있고, 러시아도 시베리아 가스개발에 한국 참여를 바라고 있다. 캐나다도 한국에 에너지를 수출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남중국해를 위태롭게 통과하는 중동산 원유수입을 줄일 수 있다. 여기에, 러시아 극동지역 개발에 참여하면서 얻을 이득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러시아의 풍부한 농산물을 이용해 고질적인 식량문제도 싸게 해결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다. 한국은 새로운 물류 거점 국가로 탄생할 수 있다. 북태평양 경제블록이 만들어지면 이곳은 인도양과 남태평양의 최종 기착기가 된다. 이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 대한해협이다. 한국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싱가포르 국부의 원천은 인도양에서 남중국해를 잇는 말라카 해협이다. 유사한 일이 한국에도 일어난다. 한·미·러 관계가 두터워지면 북한과의 관계도 새롭게 열릴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경제블록 시대가 열리면 중국은 한국을 가볍게 보기 어렵다.
북태평양 경제블록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북극항로보다 빠르게 열릴 수 있다. 미·러 간의 관계회복 속도가 관건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고 있다. 미국은 이 블록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유럽 경제블록을 대체할 수 있고 중국과 분리된 새로운 경제연합을 찾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대안이다. 러시아도 피폐된 경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트럼프와 푸틴이 집권하는 기간 중 서로의 이해를 좁혀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할 일은 이런 흐름을 지켜보며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