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밸류업 정책 탓···자본비율 관리 위해 대출 줄여
중기대출 '올인' 하나·우리, 밸류업 후 대출 문턱 높여
새 정부서도 밸류업 정책 지속될듯···대책 마련해야
[시사저널e=유길연 기자] 대형 시중은행이 최근 중소기업 대출 공급을 줄이고 있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4대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지난해 4분기부터 올해 1분기까지 두 개 분기 동안 총 3조5767억원 감소했다. 경기침체가 길어지면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 중소법인과 개인사업자들의 사정이 더욱 어려워진 셈이다.
하나·우리은행이 중소기업 대출 문턱을 높인 결과다. 하나은행의 올해 3월 말 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134조9180억원으로 지난해 9월 말과 비교해 3조1480억원 감소했다. 우리은행은 같은 기간 6조3390억원 급감했다. 국민·신한은행이 대출을 늘렸지만 두 은행의 감소 규모를 메우긴 역부족이었다.
하나·우리은행이 중소기업 대출을 줄인 이유는 정부의 기업가치제고(밸류업) 정책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정부의 정책에 따라 4대 금융지주가 밸류업 프로그램을 공개한 것은 작년 3분기다. 계획을 발표한 이후인 작년 4분기부터 이를 이행하기 위해 중소기업 대출을 줄였다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시중은행의 모기업인 금융지주가 배당과 자사주 매입 규모를 늘리려면 자본비율을 더 보수적으로 관리할 수밖에 없다. 4대 금융지주는 일제히 보통주자본비율(CET1)을 13%선을 유지하면서 주주환원 정책을 펼치겠다 밝혔다. 현재 금융지주의 자본비율 수준을 봤을 때 이를 달성하기는 만만치 않다.
이에 자본비율을 관리에 있어 '약한고리'에 해당하는 금융지주의 경우 자본비율 하락을 불러오는 중소기업 대출을 줄이는 것은 합리적이란 의견이다. 하나·우리금융지주는 지난해부터 자본비율 관리에 애를 먹었다. 두 금융지주는 환율이 올라가면 자본비율이 크게 하락하는 곳으로 평가받는다. 지난해 원·달러 환율이 상승하면서 밸류업 계획을 이행하기 위한 자본여력을 마련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하나금융의 CET1은 지난해 말 13%선을 넘었지만 작년엔 상반기까지 12% 선으로 내려앉았다. 특히 지난해 4분기엔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돼 원·달러 환율은 1450원대까지 치솟았다. CET1을 13%선으로 유지하면서 배당과 자사주매입 규모를 늘리려면 중소기업 대출을 줄이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우리금융은 4대 금융지주 가운데 가장 낮은 12%선 내외를 기록하고 있어 상황은 더 어려웠다.
이에 정부가 밸류업 정책을 더 신중하게 시행할 필요가 있었단 지적이 나온다. 특히 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은 지난 2023년부터 중소기업 대출을 적극적으로 늘리던 곳이기에 정부의 정책이 더욱 아쉽다는 평가다. 하나은행은 2023년에 중소기업 대출을 12조원 늘리면서 4대 시중은행 가운데 가장 많이 공급했다. 우리은행은 아예 작년에 ‘기업금융 명가 재건’을 선포하고 중소기업 대출에 ‘올인’했다.
밸류업 정책은 새 정부에서도 더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한국거래소를 방문해 기업이 배당을 촉진하도록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대표적인 배당주인 금융지주는 이에 맞춰 주주환원 정책을 더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정부의 주도로 기업들이 주주환원 규모를 늘리면 주식시장에 자금이 몰리고, 이는 기업업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경영난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은 당장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 특히 기술력이 있는 중소기업이 자금을 구하지 못해 사업을 접는다면 이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큰 손해다. 밸류업 정책이 가져온 역효과를 해결할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우리나라가 고도의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가능성 있는 기업에 지속적인 금융지원이 이뤄진 점이다. 국가가 은행을 통제해 소수의 기업에 저리의 대출을 끊임없이 공급한 것이다. 삼성, 현대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이렇게 해서 컸다. 정부는 이러한 ‘한국식 발전모델’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