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현대건설 ‘더 라인’ 공사 조정
유가 하락에 사우디 재정난 심화
국제행사 준비에 예산 우선 집중
네옴시티 예산 최대 60% 삭감
“인력 구조조정·계약 취소 속출”
[시사저널e=길해성 기자] 사우디아라비아가 추진 중인 초대형 미래 도시 ‘네옴시티’(Neom City) 프로젝트가 위기를 맞이했다. 국제유가 하락으로 인한 재정난과 2030년 리야드 엑스포 등 대형 국제행사 준비에 예산이 집중되면서 사업 추진이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 삼성물산과 현대건설 등 우리 기업이 참여 중인 공사도 일정 조정이 불가피해졌으며 추가 수주 가능성도 희박해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은 현재 네옴시티 내 ‘더 라인’ 지하 터널 공사를 시공하고 있다. 사업 규모는 약 6000억원으로 작년 말 기준 공정률은 약 30% 수준이다. 당초 올해 말 완공이 목표였지만 최근 사우디 발주처가 공정 속도 조절을 요청하면서 일정이 늦춰졌다. 건설사 입장에선 공사를 서둘렀다 대금을 제때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속도 조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네옴시티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비전2030’ 전략의 핵심으로 추진 중인 미래형 도시 개발 프로젝트다. 사우디 북서부 홍해 연안, 요르단과 이집트 국경 인근에 서울의 44배에 달하는 땅을 개발해 스마트 도시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네옴은 그리스어 ‘네오’(새로움)에 아랍어로 미래를 뜻하는 무스타크발(mustaqbal)의 ‘M(엠)’을 합쳐 만든 이름이다. 더 라인(직선형 수직도시)과 ‘옥사곤’(팔각형 구조 최첨단 산업도시), 트로제나(친환경 산악 관광단지) 등 3개 프로젝트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총 사업비는 1조달러(약 1500조원)에 달한다.
건설업계에선 네옴시티를 ‘제2의 중동붐’으로 불리며 수주 확대의 기회로 여겨왔다. 1970~80년대 중동 플랜트 건설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초대형 해외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전체 계획의 상당 부분이 아직 착공 전이라 향후 수백조원 규모 발주가 이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특히 네옴시티는 단순 토목을 넘는 스마트 인프라 사업이다. 국내 건설사들은 초고층, 터널, 친환경 에너지, IT 기반 시공 역량을 총동원할 수 있는 기회로 봤다.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은 더 라인을 비롯해 향후 철도, 항만, 수변시설 등 다수의 영역에서 수주 확대를 노렸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2022과 2023년 잇따라 방한하고 당시 정부 차원의 세일즈 외교가 더해지며 기대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10년간 100조원 수주’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선 “꿈의 프로젝트가 좌초되는 것 아니냐”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사우디 정부의 재정 상황이 급격히 악화된 데 따른 것이다. 사우디 경제는 여전히 원유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전체 재정 수입의 약 70%가 석유에서 발생한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90~100달러 수준을 유지해야 예산 균형이 가능하다는 것이 국제통화기금(IMF)의 분석이다. 하지만 유가는 최근 배럴당 60달러선까지 떨어졌고 OPEC+(석유수출국기구와 산유국 협의체)의 감산 완화 기조로 반등 여지도 크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사우디 정부는 작년 말 2025년 예산안을 통해 올해 수입을 3150억달러(약 464조원), 지출을 3420억달러(약 504조원)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260억 달러(약 38조원)의 재정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석유로 벌어들이는 돈이 줄자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는 배당금을 줄였고 정부는 국채를 찍어내며 부족한 예산을 메우고 있다. 올해에만 약 370억달러(약 55조원) 규모 국채를 발행했다. 이 같은 상황은 대규모 개발사업 전반에 차질을 불러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우디 정부는 한정된 재정을 국제행사 준비에 우선 투입하고 있다. 2029년 아시안 동계게임, 2030년 리야드 엑스포, 2034년 월드컵 등 굵직한 행사를 잇따라 유치한 상태다. 사우디는 국제적인 위상을 끌어올리기 위해 이들 행사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고 보고 있다. 세 가지 메가 이벤트를 위해 투입되는 예산만 700조원 이상이란 전망도 나온다.
현지에선 네옴시티가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산하 투자 전문 매체 fDi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사우디 국부펀드(PIF)는 올해 포트폴리오 전반에 대해 최소 20%의 예산 삭감을 단행했다. 네옴시티 등 일부 사업에선 최대 60%까지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네옴 관련 5조원 규모 계약이 지난해 12월 취소됐고 현장에선 인력 구조조정도 진행 중이다. 사우디 정부가 추진 중인 국제행사 준비와 연계된 인프라 사업엔 여전히 예산이 투입되고 있지만 네옴시티처럼 대규모 투자와 장기적 수익을 전제로 한 사업은 속도 조절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fDi는 “기업들이 조용히 인건비를 줄이고 있으며 일부 인력은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해고되고 있다”고 전했다.
업계 관계자는 “사우디 정부가 일단 국제행사 일정을 맞추는 데 예산과 인력을 집중하고 있다”며 “상대적으로 네옴시티가 속도 조절 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실제로 공정 조정을 요청받은 사업 다수가 네옴시티 관련 구간이다”며 “당분간 추가 수주는 힘들 전망이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