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미분양 3000가구 매입···최소 1조원 투입
수도권 비아파트 매입·신축매입약정 이어 추가 부담
“재정 압박에 1·3기 신도시 공급 계획 차질 빚을 수도”
[시사저널e=길해성 기자]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재정 부담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수도권 비아파트 주택 매입과 신축매입약정을 추진한 데 이어 악성 미분양으로 불리는 지방 준공 후 미분양 아파트 매입에 나서면서다. 주택 공급 확대를 명목으로 추진되는 정책들이 오히려 LH의 재정을 압박하고 다른 주택 공급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악성 미분양 11년 만에 최대···“미분양 매입해 지방 건설경기 살려야”
6일 업계에 따르면 LH는 지방에서 준공 후 미분양 아파트 물량 3000가구를 매입할 예정이다. 전체 지방 준공 후 미분양 물량(1만7200가구) 중 약 17% 수준이다. 악성 미분양으로 불리는 준공 후 미분양은 지난해 말 기준 2만1480가구를 기록했다. 1년 새 2배 증가한 숫자로 11년 만에 최대치다. 전체 물량의 80%(1만7229가구)가 지방에 쏠려 있다. 미분양을 해소해 지방 건설경기를 끌어올리자는 게 정부의 구상이다.
정부가 준공 후 미분양을 사들이는 건 15년 만이다. LH는 2008~2010년 7058가구를 매입했다.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며 준공 후 미분양 물량은 5만가구대까지 쌓였다. 당시 매입가는 분양가의 70% 이하였다. 정부는 이번에도 분양가보다 낮은 수준에 악성 미분양 주택을 매입해 ‘든든전세주택’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번 미분양 매입 사업 예산은 최소 1조원으로 국토부는 기존 LH 예산을 사용할 예정이다.
◇부채 2028년 236조원까지 ‘껑충’
문제는 LH의 재정 상황이 악화 일로에 있다는 점이다. LH 자체 추계에 따르면 LH의 부채는 지난해 말 기준 152조원으로 2028년 236조원까지 증가할 전망이다. 부채비율도 현재 218.3%에서 238%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공임대 사업 적자까지 겹치면서 향후 5년간 14조원 이상의 추가 적자가 점쳐지고 있다.
미분양 매입이 장기적으로 손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재무 건전성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LH가 매입하는 미분양 아파트는 대부분 지방에서 공급 과잉으로 인해 준공 후에도 팔리지 않은 물량이다. 공공임대로 전환하더라도 장기 공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나중에 분양전환을 추진해도 실수요가 부족하면 LH가 떠안은 물량이 그대로 적자로 남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미분양 주택을 두고 건설사와 진행해야 하는 가격 협상도 난제다.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LH는 미분양을 30~40% 할인된 가격에 매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사비 증가로 인해 건설사들이 가격을 크게 낮추기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LH가 높은 가격에 매입하면 나중에 회수가 어려워지고 공공 재정 낭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올해 빌라 4200가구 매입 목표···신축매입약정도 복병
수도권에선 비아파트 무제한 매입을 진행 중이다. 지난해 8월 정부가 발표한 ‘8.8 주택공급 대책’에 따라 LH는 수도권 내 빌라와 다세대를 적극 매입하고 있다. 지난해 매입 목표 3만9492가구의 87%에 달하는 3만4301가구 매입 실적을 달성했다. 올해는 지난해 목표보다 약 3000가구 늘어난 4만2000가구를 수도권에서 매입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정부는 주택 공급 확대를 명목으로 ‘신축매입약정’도 LH를 통해 추진하고 있다. 신축매입약정은 건설사와 사전 계약을 맺고 신축 아파트를 매입하는 방식이다. 건설사는 분양 리스크를 줄일 수 있지만 LH의 재정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기에 지방 미분양 아파트 매입까지 더해지면서 LH의 재정은 한층 더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장기적으로 재무 부담 가중시켜”
미분양 매입 사업에 예산이 집중되면 정작 중요한 신규 주택 공급 사업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도 나온다. 1기 신도시 재건축과 3기 신도시 조성 사업이 대표적이다. 신도시 조성을 위해서는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데 미분양 매입과 신축매입약정 등에 예산이 쏠리면 개발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LH에 주택 매입을 떠넘기는 방식이 아니라 부동산 시장을 정상화할 수 있는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권대중 서강대 일반대학원 부동산학과 교수는 “LH 주택 매입 정책이 단기적으로 부동산 시장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론 LH 재무 부담을 가중시켜 공공주택 공급 기능이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지방 미분양 해소를 위해 취득세·양도세 감면 등의 세제 혜택과 교통·교육 등 기반 시설 확충을 통한 인프라 투자가 병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