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기조연설 내용도 아쉬워
[시사저널e=고명훈 기자] ‘세미콘 코리아 2025’가 지난 19 서울 코엑스에서 개막했다. 국내외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이 대거 참여해 새로운 기술과 솔루션을 공개하고, 컨퍼런스 등을 통해 시장 전망과 인사이트를 공유하는 자리다.
주최측인 SEMI는 이번 세미콘 코리아가 역대 최대 규모로 운영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전시에 참가하는 회사만 500곳, 부스는 2301개가 운영되며, 7만명 이상의 참관객이 행사장을 찾을 것으로 예상했다. 컨퍼런스 세션만 30개나 되며, 여기에서 발표하는 연사자는 200명에 달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규모 종합전시장인 코엑스의 모든 전시관을 세미콘 코리아 행사 하나로 다 쓸 정도였다.
행사 첫날부터 세미콘 코리아 전시장 입구는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오픈 시간인 오전 10시가 다 돼가자 입장하려는 참관객들로 줄이 길게 늘어섰으며, 입장 목걸이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에 끼여 로비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많은 반도체 회사들이 각기 전시관을 화려하게 꾸미고 참관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유독 사람들이 붐비는 곳들이 있었다. 도쿄일렉트론(TEL),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MAT), ASML, 램리서치, ASM, 히타치하이테크 등 외국계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의 부스였다.
2층 규모의 역대 최대 규모로 조성된 TEL 전시관에 바이어들을 맞이하는 회의실과 취업준비생들을 위한 상담용 테이블들이 넓게 마련돼 있었으며, ASM의 전시관에서 진행되는 취업설명회엔 학생들이 다 들어가지 못해 입구 밖에서 고개를 내밀며 겨우 듣는 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현장 부스에 있던 외국계 장비회사 관계자는 “전시관을 크게 조성한 건 고객사나 일반 관람객들도 있겠지만 사실 학생들이 많이 찾아오기 때문”이라며 “예전에도 그랬지만 최근에 특히 반도체를 전공한 학생 중에서 외국계 기업에 취업을 준비하는 비중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국내 반도체 비전에 대한 인식이 조금 회의적으로 변한 영향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 우리도 우수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기조연설이 진행되는 코엑스 오디토리움 강당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첫 번째 기조연설자가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1, 2층 좌석은 꽉 찼으며, 강당 입구는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들로 붐볐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린 가운데 등장한 첫 번째 기조연설자는 삼성전자의 DS(반도체사업)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이자 반도체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송재혁 사장이었다. 마침 전날 회사 이사회를 통해 신규 사내이사로 내정되고 처음 무대에 올라선 자리였기에, 관심도 뜨거웠다. 물론 삼성전자 사장이 아닌, 차기 한국반도체산업협회장 자격으로 올라온 자리였지만, 최근 가라앉은 회사 분위기를 반등시킬 당찬 포부 같은 것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빛도 많았다.
그러나 송 사장의 기조연설 내용은 소문난 잔치에 불과했다. 불과 7개월 전 ‘나노코리아 2024’ 기조연설에서 말했던 내용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AI는 성능과 전력 소모 부분에서 아직 인간의 뇌를 따라가지 못한다”, “기존에 했던 것을 뛰어넘는 방식의 개발이 필요하다” 등 키워드까지 비슷했다. 삼성전자 또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기 극복 방안에 대한 의견도, 구체적인 개발 로드맵도, 불확실한 국제 정세 속에서 정부에 요구하는 간절한 메시지도, 그 어느 것 하나도 담기지 않은 추상적인 얘기들뿐이었다.
올 한해 처음 열리는, 그것도 대규모 반도체 행사 기조연설 무대라면 적어도 이전에 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을 발표하는 무성의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도체 산업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항상 승승장구할 수는 없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회사에서 생각하는 대안과 전략을 더 적극적으로 알리고, 자신감 있게 부딪쳤으면 한다. 피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