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브로드컴, 자사 부품 쓰도록 국내 업체에 강요”
브로드컴, 부당행위 중단·130억원 규모 국내 산업 지원 기금 마련
[시사저널e=김용수 기자] 한국 셋톱박스 제조사에 ‘갑질’한 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를 피하는 대신 130억원에 달하는 국내 산업 지원 기금을 마련하는 등의 자진 시정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9일 공정위는 브로드컴의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와 관련한 동의의결 신청을 심의한 결과 지난달 22일 이를 개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동의의결은 법 위반 혐의 사업자가 제시한 자진 시정방안의 타당성을 공정위가 인정하면 위법성을 확정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하는 제도다.
브로드컴은 국내 셋톱박스 제조사와 거래에서 불공정 거래인 ‘배타조건부 거래’를 한 혐의를 받는다. 경쟁사와 거래를 제한하고 독점적인 구매를 강요한 행위를 했단 것이다.
공정위 조사에 따르면 브로드컴은 국내 셋톱박스 제조사에 유료방송사업자의 입찰에 참여할 때 자사의 시스템반도체 부품(SoC)이 탑재된 셋톱박스만을 제안하도록 요구했다. 국내 제조사들은 브로드컴의 요구에 따라 브로드컴의 SoC를 탑재한 셋톱박스를 유료방송사에 제안했고, 이에 따라 셋톱박스 공급계약을 체결한 후 제조·공급했다.
이 가운데 브로드컴은 공정위의 심사보고서(검찰의 공소장 격) 발송 전 자진 시정방안을 마련해 지난해 10월 동의의결을 신청했다.
우선 브로드컴은 조사 혐의와 같은 강요를 중단키로 했다. 또 한국 업체들에 필요한 SoC의 과반수를 자사로부터 구매하도록 요구하거나, 이를 조건으로 가격·비가격(기술지원 등) 혜택을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하지 않기로 했다. 과반수 구매 요구를 거절하더라도 SoC의 판매·배송을 종료·중단·지연하거나 기존 혜택을 철회·수정하는 등의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고도 했다.
브로드컴은 이를 준수하기 위해 자율준수제도를 운영하기로 했다. 연 1회 공정거래법 교육을 하고, 시정방안 준수 여부를 매년 공정위에 보고하기로 했다.
특히 브로드컴은 130억원 상당의 상생기금을 마련해 국내 팹리스·시스템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고, 스타트업 등 국내 중소 사업자와의 상생을 도모하겠다고 선언했다. 교육 센터·스타트업을 위한 컨설팅 제공 및 인프라 구축·반도체 산업 관련 세미나 및 콘퍼런스 개최 등에 기금이 사용된다.
공정위는 사건의 성격, 시정방안의 거래질서 개선 효과, 다른 사업자 보호, 예상되는 제재 수준과의 균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동의의결 절차를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유럽 집행위원회나 미국 연방거래위원회도 비슷한 행위에 동의의결로 사건을 마무리했단 점에서 브로드컴이 제시한 시정안을 신속히 이행하는 것이 국내 시장의 경쟁·거래질서 개선 등 공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향후 공정위는 상생안을 구체화해 잠정 동의의결안을 마련하고, 이해관계자와 관계기관 협의를 거쳐 상반기 중 최종안을 전원회의에 상정할 계획이다. 다만 전원회의가 이를 기각하면 제재 절차로 돌아갈 수도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이번 동의의결 개시 결정은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한 글로벌 사업자가 해당 분야의 국내 스타트업 등 중소 사업자의 성장을 지원하며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과의 상생을 도모하고 해당 산업 성장에 기여한단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