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변혁기 음악가들의 고뇌
음악가들은 격동의 시기를 어떻게 보냈을까?
1979년 10월 27일 토요일 새벽. 여느 날처럼 새벽 공부를 하던 중학교 3학년 학생은 라디오를 통해 한 곡의 장송음악을 듣고 있었다. 이 곡은 너무나 비장하고 슬픔을 가슴속 깊은 곳까지 사무치게 하는 현의 선율이었다. TV 자막으로 흘러가는 ‘대통령 유고’ 문구는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그리고 2024년 12월, 우리에게 낡은 일기장의 한 페이지에서 볼 수 있었던 ‘비상계엄’이라는 낯선 상황이 그때의 기억으로 우리를 소환했다. 그때 들었던 곡은 노르웨이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가 작곡한 부수음악 <페르 귄트 모음곡>1번에 나오는 ‘오제의 죽음’이었다.
정치적인 대변혁기와 전쟁 같은 극단적인 문명의 이탈을 경험했던 음악가들은 음악이라는 소총으로 때로는 저항하고 순응하고 열광하는가 하면, 좌절하며 공허한 마음을 음악으로 담아내고, 새로운 평화를 꿈꾸기도 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음악가들이 남긴 작품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 중동전쟁과 더불어 보호주의로 무장한 미국과 중국의 G2 갈등, 그리고 정치적인 격변기로 다시 들어간 한국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남길까. 어떤 위안이 될까. 그 해결을 꿈꾸는 단초라도 제공하지 않을까.
클래식 음악의 중심축을 만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살았던 시대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등 극심한 사회 변혁기였다. 유럽 대륙의 역사를 바꿨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희망이었던 시대에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으로 전문가들이 꼽는 <교향곡 3번>을 작곡했다. 프랑스혁명의 열기에 사로잡혔던 베토벤은 ‘시민사회’의 등장에 환호하면서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전파할 영웅으로 나폴레옹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공화정 대신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황제로 등극해 종신집권을 시도하며 베토벤을 실망시켰다. 자필 악보에서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이 거칠게 긁혀 지워진 이 교향곡은 <영웅Eroica>으로 남게 됐다.
베토벤이 격변기를 표현한 다른 작품은 일명 ‘전쟁 교향곡’으로 불리는 <웰링턴의 승리 Op.91>이다. 나폴레옹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맞선 영국과 스페인, 포르투갈 연합군은 1813년 6월 21일 스페인 북서부 비토리아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이끈 프랑스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뒀다. 나폴레옹의 독재가 끝나고 유럽에 평화의 서막이 열릴 것으로 기대한 베토벤의 염원이 담긴 곡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는 영국군을 상징하는 ‘룰 브리타니아’ 선율과 프랑스군을 상징하는 ‘말보로 선율’을 사용했다. 전투 장면을 묘사할 때는 적극적으로 타악기를 사용해 나팔과 대포, 총성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음악성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당대에는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곡이다.낭만주의 시대 러시아 음악가 표트르 차이콥스키도 러시아인의 사기를 높이는 전쟁 음악을 선보였다. <1812년 서곡>은 차이콥스키가 1881년 구세주 대성당 완공 기념식을 위해 작곡한 곡으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좌절시킨 1812년의 승리를 모티프로 작곡됐다. 차이콥스키는 “이 곡은 요란하긴 하지만 나는 아무런 애정도 없이 작곡했고, 예술성도 별로 없었다”고 혹평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1890년 그가 미국 방문 중 카네기홀 개장 축하 공연에서 직접 지휘해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세기 말 격변기 약소국의 설움을 딛고 국민들에게 ‘애국주의’를 심어준 잔 시벨리우스는 지금도 핀란드의 국민 영웅이다. 1899년 시벨리우스는 교향시 <핀란디아>를 발표해 국민 작곡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1809년 나폴레옹전쟁 이후 러시아제국에 편입된 핀란드는 볼셰비키혁명 이후 1917년 독립에 성공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중 발발한 소련과의 겨울 전쟁에서 핀란드군은 수적 열세에도 결사 항전으로 임해 전 세계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요즘 핀란드의 국민 영웅 시벨리우스의 이름을 딴 시벨리우스음악학교 출신 젊은 지휘자들이 전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 혁신을 이끌고 있는 게 우연의 일치는 아닐 듯싶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고전음악은 선전전에 적극 활용되기도 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선전·선동가 요제프 괴벨스는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선도하는 도구로 바그너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나치의 주요 선전 행사에서 바그너의 곡이 연주되었는데, 건국 후 이스라엘이 바그너의 음악 연주를 금지한 것도 이때의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이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소련에서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전쟁을 반영해 작곡한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로 큰 인기를 끌었다. 쇼스타코비치가 레닌 치하에서 국민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도록 한 이 작품은, 절망에 빠졌던 소련 인민들에게 커다란 용기를 심어주었고, 전 세계에 소련의 항전 의지를 내보이는 예술 작품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독일을 상대로 2차 세계대전에 소련과 함께 연합국으로 참전했던 미국에서도 이 작품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중의적으로도 본심을 표현하는 데 주저했던 쇼스타코비치는 때로는 체제에 순응하고 때로는 항거하면서 평생을 이데올로기의 사슬 속에서 음악 활동을 계속해야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이 교향곡을 레닌그라드시에 헌정한다”고 기록했다. 패전의 암울한 그림자 속에서 죽음의 절망, 철저히 파괴된 도시에서 처절하게 살아야 했던 시민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음악가들은 때로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투영하기도 했고, 승리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작업에도 참여했지만, 궁극적으로 변혁기의 시대에 살아남아야 할 인류 공통의 가치를 음악을 통해 표현해 왔다. 전후에는 철저하게 파괴된 문명을 고발하는 도구로 무조주의 음악과 쇤베르크의 12음기법, 빌헬름 폰 베베른의 음렬주의 등과 같은 새로운 양식을 개척하는 한편, 신고전주의를 통해 평화 시대의 추억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editor 심효진
words 조영훈<리빙센스>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