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말미암아 탄생한 아름다운 음악과 숨겨진 이야기.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시민사회가 등장하고 자본주의가 싹튼 19세기는 유럽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로 평가된다. 1815년 나폴레옹전쟁이 끝나고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문을 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유럽은 100년의 평화 시대를 맞는다. 그 같은 사회 변혁과 경제적인 성장은 음악사에서 고전주의의 시대를 마감하고 낭만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 사조를 열어준 이 시대는 음악가들에게도 ‘술 권하는 사회’가 일상화된다. 술은 때로 음악가들에게 음악적인 영감을 극대화하는 자양분이기도 했지만, 전설적인 음악가들이 단명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유독 음악가들과술에 얽힌 에피소드가 많은 것도 이 같은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다.
음악의 성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도 잘 알려진 애주가다. 그는 와인 애호가이자 맥주를 물처럼 음용한 음악가였다. 베토벤은 지인들과는 주로 맥주를 마셨다고 한다. 그는 식사 때마다 프랑스의 보졸레누보처럼 그해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오이리게 와인을 즐겼다. 난청이 왔음에도 하루 한 병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 해부학자들은 알코올로 인해 그의 간이 절반으로 쪼그라들었다고 증언한다. 베토벤 가문은 대대와인을 반주로 마시는 문화가 있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와인 판매업자로 알려졌으며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는 알코올 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토벤과 술에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하나. 1827년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악보 출판업자가 그에게 라인산 와인을 선물했는데, 그가 너무 늦어서 유감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와인 마니아다운 면모다. 아무튼 와인으로 고양(?)된 그의 감성이 우리가 듣는 교향곡, 소나타 한곡 한곡에 묻어 있는 셈이다. 대표적인 교향곡 7번은 베토벤이 술에 취해 작곡했다고 알려질 정도. 명작 ‹킹스 스피치›에서 말더듬이 킹 조지 6세의 명연설에 비장함을 더한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된 이 교향곡은 작품성을 높인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베토벤이 애주가라면 낭만주의 음악가들은 폭음가가 주류다. 더 자유롭고 더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간 음악가들에게 생긴 일종의 후유증(?)인 셈이다. 리사이틀의 창시자이자 독주 음악가의 전성시대를 열고 막대한 수입을 올린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는 하루에 코냑이나 와인을 반드시 한 병에서 두 병 정도 마셨다고 한다. 그의 제자들 역시 그를 알코올 중독자로 여겼을 정도다. 그가 남긴 ‘에튀드’의 음악적 난이도와 상상을 초월하는 기교를 생각한다면 사실 맨정신에 연주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프랑스의 대표 코냑 브랜드인 비네 델페시의 대표 상품인 알코올 도수 40도의 리스트 코냑XO는 국내에서도 인기 있는 품목이다.
고뇌하는 영혼, 우울하면서도 철학적인 느낌을 절대 음악에 담아낸 요하네스 브람스도 술고래였다. 함부르크의 선술집 콘트라바스 연주자의 장남으로 태어난 브람스는 그의 음악적인 후원자 슈만과 클라라를 만나기 전까지 생계를 위해 선술집이나 카페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어떤 때는 만취해서 입에 담지 못할 말도 했다고 전해질 정도니, 그도 알코올 의존도가 어느 정도는 있었던 음악가였을 것이다. 정신질환을 앓았던 그의 후원자 로베르트 슈만도 알코올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술은 감성적인 가곡에 영감을 주었던 자양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천재적인 음악성에도 불구하고 작은 키와 소심한 성격으로 사후에야 빛을 본 프란츠 슈베르트도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그를 추앙(?)해 경제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친구들과의 잦은 모임은 자연스럽게 그를 애주가로 만들었다. 심지어 그는 술과 직접 관련 있는 성악곡을 20곡 넘게 작곡하기도 했다. 한심하고 수치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술이 없었다면 그의 가곡 작품도 없었으리라.
낭만주의 알코올 의존증 최고봉은 얼마 전 임윤찬의 새로운 해석으로 다시 한번 조명된 ‘전람회의 그림’을 작곡한 모데스트 무소륵스키다. 40세가 될 때까지 우체국 등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음악가로 투잡을 뛴 그는 대표적인 보드카 애호가였다. 실직 후 실의에 빠져 보드카에 의지하던 그가 1881년 연주 중에 쓰러진 원인도 알코올 질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42세의 젊은 나이에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마지막 초상화를 보면 술에 농익은 모습이 선명할 정도다.
스탈린 독재 체제에서 많은 러시아 음악가는 시련의 계절을 보냈다. 언제 사상 비판을 받을지, 유배 또는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 속에서 전 세계 술 소비 1위 국가인 러시아의 음악가들도 보드카의 힘에 의존했다. 대표적인 인물이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그는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으로 망명했고, 당국의 회유로 귀국했음에도 극단적인 문화 통제 때문에 술에 의존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집은 설움에 가득찬 음악가들의 사랑방이 됐다는 후문이다.
핀란드의 국민 음악가 잔 시벨리우스도 대표적인 알코올 애호가다.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싸워야 했던 그의 일생을 생각하면 ‘술’ 없이 잠을 이루지도, 작곡을 하지도 못했으리라. 65세 이후 금주를 선언하고 은퇴한 그는 91세까지 장수했다. 금주 이후 그의 작곡 활동이 중단된 점은 아쉽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추가하면, 피아노의 시인 프레 데리크 쇼팽. 그는 고국 폴란드를 떠난 프랑스에서 성공한 음악 교습가와 작곡가, 연주자로 명성을 날렸지만 망국의 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태생적인 약골 탓에 음주를 즐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그가 고국 폴란드의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오르면서 폴란드 원산지의 최고등급 ‘쇼팽 보드카‘가 면세품인기 품목으로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editor 심효진
words 조영훈<리빙센스>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