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밀자료 불법 취득, 美특허소송에 활용한 혐의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불법적으로 취득한 삼성전자 기밀정보로 미국에서 삼성전자를 상대로 특허침해소송까지 냈던 안승호 전 삼성전자 IP(지식재산권)센터장(부사장)과 공동피고인들이 첫 재판에서 혐의를 부인했다.
피고인들이 대체로 사실관계를 인정하는 만큼, 향후 재판은 범죄 요건성립 등 법리적 공방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한대균 부장판사)는 10일 오전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영업비밀누설등) 혐의로 기소된 안 전 부사장과 배임수재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동호 전 삼성디스플레이 출원그룹장 등에 대한 첫 공판을 진행했다.
이날 피고인들은 기록복사 지연과 검토 미비를 이유로 공소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전반적으로 혐의를 부인한다는 의견을 냈다.
안 전 부사장 변호인은 ‘범죄를 부인하느냐 자백하느냐’는 재판부의 물음에 “부인한다”라고 답했다. 이 전 그룹장의 변호인도 “전반적으로 부인하는 입장이다”면서 “사실관계를 인정하되 법리적으로 부인하거나, 사실관계 자체를 다투는 것도 있다”라고 말했다.
재판장은 신속한 심리 진행을 위해 다음 기일 증거조사가 가능한지 검찰 측에 물었다. 재차 공소사실에 대한 의견을 받기 위해 속행이 열리면 재판이 공전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하지만 검찰은 증거채부가 결정된 다음에야 조사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이에 재판부는 피고인 측에 공소사실에 대한 의견과 증거인부 의견을 오는 31일까지 제출하도록 하고, 검찰 측에 이를 바탕으로 증거신청을 완료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음 기일은 다음 달 13일 오전에 열린다.
◇ 지적재산권 방어 수장, 퇴사 후 불법적으로 회사 공격
안 전 부사장은 2021년 삼성전자 IP센터 직원으로부터 회사 내부 기밀정보가 담긴 보고서를 불법적으로 건네받아 누설하고, 삼성전자와의 특허 침해소송에 활용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에 따르면, 안 전 부사장은 삼성전자 IP센터의 초대 센터장을 지내며 10년간 특허 방어 업무를 총괄한 인물이다. ‘특허 괴물’로 불리는 특허관리기업(NPE·Non Practicing Entity) 방어 업무를 담당했다. NPE는 직접 생산 활동은 하지 않은 채 보유한 특허권의 행사만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사업자다. 안 전 부사장은 2019년 삼성전자에서 퇴사한 뒤 도리어 이듬해 직접 NPE인 ‘시너지IP’를 설립했다.
그는 NPE를 운영하면서 음향기기 업체인 미국 ‘테키야’를 대리해 삼성전자와 특허에 대한 라이선스를 협상하던 중 2021년 8월 삼성전자 직원과 공모해 기밀정보가 담긴 내부 보고서를 불법적으로 취득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를 분석해 같은해 11월 삼성전자를 상대로 미국 법원에 특허 침해 소송을 냈다. 그는 소송 과정에서 삼성전자에 9000만달러에 달하는 합의금을 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사건을 재판한 미국 법원은 안 전 부사장이 부정한 행위로 특허소송을 제기했다고 판단하면서 재소송이 불가능한 기각 판결(dismissal with prejudice)를 선고했다. 미국 법원은 판결문에서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부정직하고, 불공정하며, 기만적이면서, 법치주의에 반하는 혐오스러운 책략을 실행했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 수사는 지난해 3월 삼성전자로부터 접수된 고소장으로 시작됐다. 검찰은 통신, 이메일, 계좌 추적을 통해 안 전 부사장의 범죄를 인지하고 강제수사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