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령' 책임으로 준법감시인 사임했다 강조했지만
부행장 유지한채 보직 변경···내부서 "사임 맞나" 성토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불만 이어져

[시사저널e=유길연 기자] 최근 우리은행에서 180억원 규모의 횡령 사건이 또 발생했다. 지난 2022년 본점 직원이 회삿돈 700억원을 유용한 이후 2년 만이다. 금융권에선 우리은행의 내부통제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우리은행은 발 빠르게 대처했다. 박구진 준법감시인 부행장을 교체한 것이다. 이 자리엔 전재화 우리금융지주 부사장이 새로 임명됐다.

우리은행은 보도자료를 배포해 박 부행장이 횡령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고 강조했다. 인적 쇄신을 통해 시스템 전반을 밑바닥부터 다시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더 나아가 조병규 우리은행장은 직원들에게 메일까지 보내 이번 인사에 대한 의미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책무를 등한시해 은행의 신뢰를 훼손하는 경우에는 앞으로도 엄중하게 조치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이번 인사는 우리은행이 밝힌 것과 달리 엄격하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 부행장은 준법감시인 자리에선 물러났지만 IT그룹 내 한 조직(데이터솔루션 ACT)의 장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부행장 직급이 여전히 유지된 채 업무만 바뀐 것이다.

지난해 대규모 횡령 사건이 벌어진 후 경남은행이 취했던 조치와 대조적이다. 당시 리스크관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정용운 경남은행 상무는 횡령 사건 직후 직무배제됐다. 그해 연말인사에서도 지주, 경남은행 준법감시인은 임기가 1년 남았지만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다른 계열사에서도 임무를 맡지 않았다. 

우리은행 내부에서 ‘사임’이란 단어를 너무 쉽게 쓴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준법감시인 자리에서 물러나더라도 부행장 직급을 유지하면서 다른 임무를 수행한다면 이를 사임이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결국 이번 횡령 사건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불만이 커진다.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도 이번 인사가 적절치 않다는 글이 다수 올라오는 상황이다. 

더구나 박 부행장이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IT 관련 조직으로 옮긴 점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그간 외부 전문가를 영입하는 등 디지털화를 강조하던 우리은행의 방향과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은행은 박 부행장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테스크포스(TF)의 책임자를 맡은 것이기에 전문성 측면에서 문제가 없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인사부 부장을 지내는 등 디지털 업무 경험이 없는 박 부행장에게 IT부문장을 시킨 점은 자리 이동에 급급한 결정 아니냐는 반응도 나온다.

물론 박 부행장의 책임의 범위와 징계 여부 등은 은행이 판단할 부분이다. 특히 이번 횡령 사건은 지점에선 잡아내지 못했지만, 본점 조직에서 발견한 점도 고려해야 할 대목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우리은행 직원이 이번 인사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고객들은 어떻게 볼까. 적어도 이번 인사를 두고 ‘사임’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쇄신을 강조한 것은 성급한 조치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우리은행은 그간 여러 좋지 않은 사건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직원들의 사기도 많이 떨어졌다. 이에 우리은행은 고객 신뢰를 회복하고 조직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횡령이란 중대한 사건이 잇달아 터졌는데도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뒷말이 무성하다면 그간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사건에 대한 적절한 조치와 알맞은 소통 전략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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