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테토의 아트스페이스 56

 최초의 물질을 찾아서

색연필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흔적들이 모여 하나의 파동으로 변화하기까지.
지근욱 작가가 매일 선을 그으며 생각한 것들. 

자를 대고 색연필로 선을 긋는 과정을 반복해 탄생하는 작품.
자를 대고 색연필로 선을 긋는 과정을 반복해 탄생하는 작품.
최근 작가는 겔 미디엄을 캔버스 표면에 발라 작품에 깊이감을 표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최근 작가는 겔 미디엄을 캔버스 표면에 발라 작품에 깊이감을 표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눈이 감각할 수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일

지근욱 작가는 색연필을 매개로 실제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시각화해 캔버스 위에 표현한다. 안료를 뭉쳐서 만드는 색연필. 심이 캔버스에 맞닿아 부서지면서 가루들이 색을 남긴다. 그 가루는 아마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최초의 물질일 것이다. 입자와 양자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색연필의 물성에 주목했다. 색연필이 그리는 선은 멀리서는 매끈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크레파스로 그은 것처럼 울퉁불퉁한 표면에 거칠게 흔적을 남긴다. 어찌 보면 굉장히 불완전한 재료이지만, 작가에게 색연필은 원초적인 물질을 떠올리게 하는 흥미로운 소재였다. 작가는 색연필로 정교한 패턴을 그린다. 혹자는 프린트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선의 굵기나 간격, 패턴의 형태가 일정하고 기계적이다. 불완전한 소재로 탄생시킨 도식적인 패턴은 서로 상반되지만 그런 점이 관람객에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간다. 색연필로 선을 그으며 캔버스를 채워가는 일. ‘한땀 한땀’ 그어진 선들은 작가의 작업 과정에서 이루어진 노동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작품을 보면 선이 그어지는 과정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선이 그어지며 완성된 패턴은 평면 위에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인다. 선들은 파장을 일으키며 어딘가로 향하고 그 장면이 관람객을 잠깐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눈의 경험이 마음과 몸의 경험으로 확장되고, 관람객은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나 잠시 새로운 차원으로 여행을 다녀오게 되는 것이다.

작업을 위해 제작한 다양한 형태의 자들.
작업을 위해 제작한 다양한 형태의 자들.

 

외부 자극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찾을 수도 있지만,

저라는 사람은 아주 단순한 행위라도 매일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하고 있어야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온다고 믿어요.

작업실 벽면에 다양한 패턴 샘플들이 진열되어 있다.
작업실 벽면에 다양한 패턴 샘플들이 진열되어 있다.
작가가 사용하는 색연필들이 가지런히 정리된 수납함.
작가가 사용하는 색연필들이 가지런히 정리된 수납함.

판화를 전공하셨지만, 현재 작품은 판화가 아니죠?
네, 처음 시작은 판화지만, 국에서 아트&사이언스를 전공하면서 작업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어요. 판화는 뭔가 테크닉을 습득하고, 그걸 표현하는 과정에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요. 하지만 나만의 작업, 주제 의식이나 어떤 세계관을 창작하기에는 제한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물론 현재 제 작품에 판화적 요소들이 남아 있긴 합니다. 뭔가 반복적이고, 핀이 정확하게 맞아야 하는 것들. 제 작업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장점으로 바뀌기 시작하더라고요. 작업의 장르가 변화하긴 했지만, 작업에서 보이는 납작하고 매끈한 느낌들은 판화적이라고 할 수 있죠.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판화를 전공하면 뭔가 정교하게 분석하고, 꼼꼼하게 계산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작품에서도 그런 면이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판화를 하면서 생긴 성향이 제 작업 스타일에도 영향을 주긴 한 것 같아요. 만약에 A부터 D까지 가야 하는데, B나 C라는 과정이 없으면 그 뒤를 망치게 되고, 그 순서가 명확해야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작업을 구상할 때 계획을 철저히 세우게 되더라고요. 판화를 오래 하다 보면 그런 습성이 성격이 되고, 좀 강박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트&사이언스라는 전공은 어떤 것들을 배우나요?
처음에는 키네틱아트처럼 뭔가 기술적인 것들을 많이 배우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요. 실제로는 인문학과 해부학을 포함해 사회과학적인 부분을 파고들고, 뭔가 주제 의식을 갖게 하는 수업이 많았어요. 저는 예전부터 우주과학이나 물리학에 흥미가 있었는데, 이런 것들을 순수예술로 풀어내는 과정 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등 큰 도움을 받았어요. 우주, 양자역학, 입자, 물리운동... 이런 제 관심사를 작업으로 풀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 거죠.

과학에 대한 관심이 예술로 다시 탄생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지금의 색연필 작업은 어떻게 시작되었어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당시만 해도 판화를 계속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작품의 서명은 무지갯빛 색연필로 하면 더 멋있어 보일 것 같아 한 자루를 챙겨갔습니다. 작업을 하다가 페인팅을 하면서 부분적으로 색연필을 사용한 적이 있어요. 그 과정이 디벨롭되고, 그 장면을 ‘줌인’해 보면 어떠냐는 교수님의 제안이 있었어요. 그래서 바로 집에 가서 색연필로 작업을 해봤죠. 꽤 큰 크기였는데 완성하고 어떤 감동을 느꼈어요. 색연필로 이렇게 큰 화면을 도 있게 채울 수 있었다는 점이 굉장히 고무적 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색연필로만 작업을 해온 거군요. 앞으로도 계속 사용할 예정인가요?
색연필을 사용한 지 10년이 조금 안 됐는데요, 이 시리즈 작업이 아직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한 20년은 넘게 해야 그 과정과 결과물에 자신이 생길 것 같아요(웃음).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색연필만으로 작업하지만, 어떤 변화의 과정 속에서 언젠가 색연필을 사용하지 않는 날이 올 수도 있다고 보고요. 색연필이 제 정체성이 되긴 했지만,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경계심을 갖고 있거든요. 최근에는 선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프린팅을 하거나, 겔 미디엄을 바르는 등 작은 변화들을 시도하고 있어요.

정교한 작업이 진행되는 작업실은 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정교한 작업이 진행되는 작업실은 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작업에 사용할 색연필을 고르고 있는 지근욱 작가.
작업에 사용할 색연필을 고르고 있는 지근욱 작가.

색연필로 선을 긋는 건 단순한 작업의 반복 같은데, 그 과정에도 의미를 부여하나요?
아직은 수행이다, 명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실 색연필을 긋는 행위는 정신을 내려놓은, 무의식적으로 가는 편안한 상태의 반복이 아니라, 실제로 각을 맞춰야 하는 강박적인 노동이에요. 스트레스도 많고요. 제 작업이 뭔가를 표현한다면, 반복적인 노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패턴이 만들어내는 움직임, 가상의 운동, 확장성 같은 것이에요.

아까 작업하는 모습을 관찰했는데, 실제로도 굉장히 고돼 보였어요. 작업 과정이 힐링은 아닌가 봐요.
저는 좀 고지식한 편이라 매일의 일노동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엔 어딘가에 닿을 거라고 믿거든요. 그래서 급격하게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편이에요. 예전에 정상화 작가님의 인터뷰에서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이 있는데요, “자기 발등 밑에 새로움이 있다”. 매일 자신의 것을 반복해서 해내야 할 때, 그 안에서 새로움이 있다는 말이었던 것 같아요. 그걸 하지 않으면 새로움이 나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얘기. 외부 자극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찾을 수도 있지만, 저라는 사람은 아주 단순한 행위라도 매일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하고 있어야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온다고 믿어요.

작업할 때 색연필을 자주 깎는 걸 봤습니다. 색연필이라는 소재의 특성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색연필은 색이 있는 원료를 굳혀서 만들어졌잖아요? 어떤 입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재료라는 점도 흥미롭죠. 그리고 캔버스에 닿아서 선이 그어지는 것 같지만, 그 선은 자세히 보면 입자들이 부서져서 만들어지는 흔적이거든요. 매일 똑같이 힘을 주고 선을 긋지만 부서지는 밀도나 표현이 매일 조금씩 달라요. 그런 우연성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작품 안에서는 표현되거든요. 제 작업은 어찌 보면 프린트로 출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색연필을 일일이 긋는 행위가 아니었다면 탄생할 수가 없죠.

색연필로 화면을 채우는 작업이지만, 어떤 작품에서는 여백에 눈이 가기도 합니다.
작품마다 차이는 있지만, 어떤 작품은 여백이 주인공인 경우도 있어요. 선 사이의 틈 같은 것들, 저는 잔상의 간격들이라고 구상하면서 작업을 하기도 하거든요. 선 사이로 투과되는 여백 을 고려하는 경우도 많아요.

과학에 대한 관심을 예술로 승화한 이야기가 정말 흥미로웠어요. 최근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도 우주에 대한 관심을 반 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프람프트 프로젝트에서 진행 중인 단체전 <flyby>에 출품한 작품은 ‘스페이스 엔진’이라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경험하고 완성한 작품이에요. 가상의 우주를 3D로 경험할 수 있는데, 예전 부터 동경하던 우주를 직접 체험한 것 같은 경험이, 제가 상상하고 다가가고 싶었던 우주의 형태를 저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CREDIT INFO

editor    심효진
photographer    김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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