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그림의 ‘맛’다른 여행 18

 튀르키예의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미술관

튀르키예는 잘 알지만 이 나라의 예술은 잘 몰랐던 사람들에게
‘이즈미르 회화 및 조각 박물관과 쿨투르파크 미술관’을 소개한다.

햇살 가득한 뮤지엄 캠퍼스.

흔히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이 ‘튀르키예’라고 이야기한다. 달리 얘기하자면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초월하는 컬렉션을 자랑하는 미술관이 튀르키예에 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다만 우리에게 익숙한 도시 ‘이스탄불’이 아닌 낯선 ‘이즈미르’라는 도시에 자리한다. 세계 곳곳에 숨어 있는 멋지고 재미있는 미술관들을 발견하는 재미란!

이즈미르는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어 튀르키예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무려 3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인류가 신석기시대부터 정착한 역사까지를 따지자면 최대 85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다. 지리적으로는 서부 해안 중앙에 자리해 오랫동안 튀르키예의 주요 상업 도시로서 그리스와의 무역 중심지 역할을 했다. 1923년 그리스와 튀르키예 간 인구 교환이 있기 전까지 이즈미르 인구의 반 이상을 그리스인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즈미르 항구에서 배로 15분이면 그리스로 건너갈 수 있어 “잠깐, 그리스에서 커피 한잔하고 올게” 하고 다녀올 수 있을 정도랄까.

최신식으로 리모델링해 쾌적한 전시 환경을 제공하는 전시장 내부.
최신식으로 리모델링해 쾌적한 전시 환경을 제공하는 전시장 내부.

이처럼 그리스 문화권과 굉장히 긴밀하게 연결된 곳이라서 그런지 이즈미르 시내 중앙에는 기원전 4세기에 건설된 ‘아고라’가 있다. 모임 또는 집회를 열었던 곳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예술과 사업이 활성화 된 곳일 뿐 아니라, 사회적 기능과 영적·정치적 삶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는 증거다. 과거부터 문화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해오던 이 도시엔 어떤 것이 숨겨져 있을까.

‘이즈미르 회화 및 조각 박물관과 쿨투르파크 미술관’은 12개의 건물로 구성된 캠퍼스 형태의 담배 공장을 리모델링해 2023년 개관했다. 무려 140여 년 동안 담배 공장으로 사용되던 곳을대규모 예술 캠퍼스로 탈바꿈시키다니, 정말 대단한 ‘역변’이 아닌가. 이 엄청난 사실을 기념하고자 <모더니즘의 추구>라는 대규모 특별 개관전을 열었다.

튀르키예의 모더니즘은 어떤 모습일까? 전시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가는 제바트 데렐리Cevat Dereli였다. 데렐리는 1924년 튀르키예 국가 장학금을 받고 프랑스로 유학했고,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작품 세계를 펼친 국민 화가이다. 1956년에는 튀르키예 대표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전시했다. 또 파리에서 유학한 후 모더니즘을 추구했던 마흐무트 제말레틴 쿠다Mahmut Cemalettin Cûda의 작품을 보면 서서히 서구화되는 당시 오스만제국의 회화를 볼 수 있다. 전시를 보다 보면 여기가 오르세 미술관인가 싶을 정도로 인상주의풍 그림들이 가득해서, 당시 파리로 유학을 떠났던 오스만제국의 예술가들도 놀라웠지만, 전 세계적으로 인상주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로마 제국의 조각들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제국의 조각들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오스만제국, 튀르키예의 예술 하면 떠오르는 것은 사실 비잔틴 모자이크와 성화다. 이 나라가 가장 부강했던 시기의 예술에만 생각이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문득 반성하게 되었다. 왜 이 나라의 다른 시기, 다양한 사조의 그림들엔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우리는 대체로 편견에 싸여 살아간다. 내가 보아왔던 세계가 전부라고 부지 중에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예술은 편견 없이 세계 곳곳에서 서로 스며들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며, 더 넓고 큰 세상을 볼 수 있게 만드는 좋은 수단이다. 이것이 예술이 가진 특별함이다. 인종이 다르고 국적이 다른 모두가 새로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모여 새 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 지구상 누구나 소통이 가능한 언어인 예술은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뜨겁게 소통하도록 도와준다.

이 전시를 현지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와 함께 찾았다. 어느 시대, 어떤 나라의 예술인지 개의치 않으며 그저 감상하는 그 자체를 즐기는 아이를 보며, 어쩌면 시대와 지역의 구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제대로 된 감상법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들던 아고라가 있는 이곳에서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모여 진정한 소통의 도구로 예술을 발전시킨 것일 터. 2023년 새롭게 개관한 이즈미르 회화 및 조각 박물관과 쿨투르파크 미술관을 통해 지금은 그저 오랜 유적으로 남아 있는 아고라의 기능이 이 도시에서 다시 한번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앞으로도 이곳이 시대와 세대를,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소통의 장이 될 수 있기를.

분주한 시내 한가운데에 자리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평안함이 가득한 카페.
분주한 시내 한가운데에 자리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평안함이 가득한 카페.
현지식 밀도 높은 시미트와 곁들임용 치즈와 올리브, 그리고 서구의 맛을 가득 담은 현지 음료.
현지식 밀도 높은 시미트와 곁들임용 치즈와 올리브, 그리고 서구의 맛을 가득 담은 현지 음료.

뮤지엄 캠퍼스 정문 입구 왼쪽 끝에 자리한 카페. 뮤지엄 건물을 돌며 전시를 보고 나와 정원을 따라 걷다 보면 발견할 수 있다. 터키 전통 디저트와 빵, 티와 커피뿐 아니라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아메리카노와 달달한 케이크도 함께 판매한다. 내국인과 외국인 모두가 편안히 즐길 수 있는 메뉴. 시미트는 아주 밀도 높은 질감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입만 먹어도 빵 한 덩이를 다 먹은정도의 밀도랄까. 이곳 미술관이 소장한 시간의 밀도를 식감으로 표현한다면 이와 같으려나.

오그림@ohgrim_

예술을 향유하는 방법을 친절하게 공유하고 알려주는 브랜드 ‘아트살롱 오그림’을 운영한다. 여행을 좋아하며, 여행지에서 만나는 예술 작품에 특히 더 애정을 느낀다.


CREDIT INFO

editor    심효진
words    오그림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