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제 후회수’ 국회 통과했지만 대통령 거부권에 막혀
새로 나온 정부안도 법 개정 필요···여소야대 국면에선 불투명
[시사저널e=길해성 기자] 전세사기가 폭증한 2022년 9월부터 정부가 여러 대책을 내놨지만 전세사기 피해는 아직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2023년 7월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지금까지 인정된 피해자는 1만7000명을 넘어섰다. 특별법이 일몰되는 2025년 7월까지 피해자 수는 3만6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추가 피해를 막고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해선 특별법 개정이 시급하지만 정부는 물론 여야는 정쟁만 벌이고 있다. 야당이 원하는 ‘선구제 후회수’ 내용이 담긴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은 지난달 2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지난 21대 국회에서 폐기됐다. 선구제 후회수 방식은 보증금을 회수하기 어려운 피해자들의 채권(전세보증금)을 공공기관이 매입해 보증금의 30%가량을 먼저 돌려주고, 추후 채권 추심·매각 등을 통해 공공기관이 재원을 회수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전날 정부는 지난달 27일 ‘전세사기 피해자 주거안정 지원 방안’을 내놨다. 지원방안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전세사기 피해자 주택을 경매로 사들이고 최장 20년까지 살 수 있도록 피해자들에게 임대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아울러 LH 감정가와 낙찰가의 차액(경매 차익) 만큼을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LH가 감정가 1억원인 전세사기 피해주택을 6800만원에 낙찰받을 경우 3200만원을 피해자 지원에 쓴다는 뜻이다. 그간 매입 대상에서 제외한 위반 건축물과 신탁 전세사기 피해주택도 매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정부가 새로운 방안을 내놨지만 피해자들은 여전히 불안 속에 살고 있다. 기존 대책의 불신에서 비롯됐다. 올해 4월까지 전세사기 특별법 지원책을 이용한 건수는 1만여건이다. 7000명은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다. 피해자로 인정받기도 쉽지 않다. 피해자들은 임대인의 전세사기 의도를 입증해야 한다. 2년이나 4년 전의 일을 스스로 되돌이켜 봐야 하는 셈이다. 임대인의 의도는 수사를 해야 명확히 알 수 있지만 한두명이 고소장을 내서는 수사가 쉽지 않다고 호소한다. 피해자들 사이에선 “이왕 사기당할 거면 유명한 임대인에게 당하는게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미 지원을 거절당한 피해자들은 이번 대책도 실질적인 지원책이 되지 못할 것이라 우려한다. 또한 거부권에 가로막힌 특별법 개정안엔 명도 소송을 유예하는 방안이 있었지만 정부안에선 빠졌다.
대책의 시행 시점을 가늠할 수 없다는 점도 불안을 키우는 요인이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대책도 특별법 개정이 필요하다. 정치 상황에 비춰보면 구제를 바로 받는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법 개정을 위해선 새로운 22대 국회에서 다시 처음부터 여야 합의를 거쳐야 하는데 야당은 이번에도 선구제 후회수를 골자로 한 전세사기 특별법 등을 재추진한다는 방침이어서 양측의 갈등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하고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나 하루가 다르게 피해자들의 상황은 악화하고 있다. 여야가 정쟁을 벌이는 사이 구제를 기다리는 피해자들의 고통은 더욱 길어질 수밖에 없다.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1년 동안 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해자는 더 나올 수 있다.
정부와 여야는 지금이라도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전세사기가 발생한 원인과 유형이 다양하고 복잡하기에 피해자 구제를 위한 해결책은 단일할 수 없다. 정부안과 야당안에서 협의점을 찾아 절충안을 낼 필요가 있다.
피해자들은 오늘도 거리로 나왔다. 전세사기 피해자 단체는 10일 국회를 찾아 우원식 국회의장을 만나 특별법 개정안 마련을 촉구했다. 이들은 “22대 국회에선 피해자들이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도록 정부안을 비롯해 촘촘하고 안전한 피해 구제를 위한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폐기된) 선구제 후회수 방안과 정부안은 양립이 가능하다”며 “보증금 채권 매입을 통한 선구제 후회수와 LH를 통해 경매차익을 활용하는 정부안이 서로 보완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