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음악가를 만든 ‘내조의 여왕들’
세계적인 음악가는 그냥 탄생하지 않았다.
그들을 있게 한 여성 음악가들.
위대한 작곡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천재’다. 그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수백 년 전의 위대한 작품들은 방송에서, 영화에서 혹은 음악회에서 지금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베토벤이나 헨델처럼 독신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창조한 사람들도 있지만 결혼을 통해 가족을 꾸리고 음악을 생계의 수단으로 활동한 경우가 대다수다. 음악가의 아내에 대해서는 가십거리 정도로 여기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아내가 악처였다고 알려진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빛나는 내조로 음악가들을 반석위에 세운 위대한 내조의 여왕들이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꼽히는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두 번째 아내 안나 막달레나는 대표적인 내조의 여왕이다. 바흐의 육촌 누나였던 첫 번째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36세에 사망하자, 바흐는 이듬해인 1721년 16세 연하인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결혼해 13명의 자녀를 낳았다. 바흐가 평생 가족을 사랑하는 가장으로 20명의 자녀를 헌신적으로 교육하고 키워낸 데는 안나의 내조가 큰 역할을 했다.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차남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막내 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음악가로 키워낸 데는 그녀의 내조가 큰 힘이 됐다. 무엇보다 작센의 차이츠 궁정 트럼펫 연주자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소프라노로도 재능을 인정받았고, 대위법 등 음악이론에 밝고 악보를 그릴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어 바흐의 음악적인 동반자 역할에도 충실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50년 볼프강 슈미더가 정리한 작품번호BWV에 따르면, 바흐는 1126번에 이를 정도로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이외에 기타 미완성이나 바흐의 자필 사본이 아닌 경우는 안나가 사보한 경우가 많아 BWV-Anh으로 분류되며, 이 또한 189번에 이른다. 첫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칫 위기에 빠질 수 있었던 바흐를 내조해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작품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된 사람이 그의 아내 안나 막달레나였다.
평론가와 작곡가로 활동하며 낭만주의 음악 사조를 만든 1등공신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과 세기의 사랑으로 유명한 아내 클라라 슈만도 빼놓을 수 없는 내조의 여왕이다. 슈만은 9세 연하인 자신의 피아노 스승 프리드리히 비크의 딸 클라라와 결혼을 위해 법정투쟁까지 감행했다. 슈만은 결혼에 성공한 1840년에 ‘시인의 사랑’과 ’여자의 생애‘ 등 주옥 같은 가곡을 남겼다. 그는 클라라와 함께 대위법을 공부하면서 왕성한 작품활동에 나서 결혼생활 16년 동안 교향곡을 비롯해 피아노 5중주 등의 실내악과 협주곡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그만의 낭만주의 작품들을 쏟아낼 수 있었다.
클라라는 북독일 지역에서만 겨우 이름이 알려진 슈만에 비해 전 유럽에 알려진 천재 피아니스트였다. 그녀는 11세에 니콜로 파가니니와 협연을 할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 그녀는 연주회에서 항상 슈만의 작품을 연주해 그의 작품이 전 유럽에 알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클라라는 슈만이 정신병으로 입원한 다음부터 작곡을 중단하고 연주 활동에 매진했고, 1856년 슈만이 46세의 나이로 사망한 이후에는 일곱 자녀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생 동안 1000번이 넘는 연주회를 뛰었다. 생계형 연주자였던 셈이다. 클라라는 슈만의 제자였던 14세 연하의 요하네스 브람스와 평생 동안 교류하며 그의 음악세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을 둘로 나눴던 음악계에서 ’절대음악‘의 거성인 브람스의 음악 세계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 클라라였다.
프란츠 리스트의 혼외자였던 코지마 바그너도 내조의 여왕으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리스트가 마리 다구 백작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 자녀 중 차녀인 코지마는 어린 시절 양육권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았고,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와 첫 결혼에 성공했다. 하지만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에 빠져든 코지마는 바그네리안이 되면서 그의 비서를 자처하게 되고, 1865년에는 둘 사이에서 불륜으로 첫아이인 이졸데를 낳았다. 3명의 자녀를 출산한 코지마는 뷜로에게 끈질기게 이혼을 요구해 1870년 바그너와의 재혼에 성공했다.
코지마와의 결합으로 바그너는 날개를 달았다. 코지마가 비서 겸 음악감독, 시나리오 작가, 매니저 등 일인 다역을 소화하며 바그너의 작품활동에 기여함으로써 바그너는 역작 ‘반지’ 시리즈를 완성하게 된다. 바그너와 코지마가 마지막에 거주했던 바이로이트를 바그너의 성지로 만든 장본인도 코지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는 1876년 ‘니벨룽겐의 반지’ 초연이 이뤄지고 6년 뒤인 1882년바그너의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도 처음 연주됐다.
하지만 1883년 바그너가 사망하자 충격에 빠진 코지마는 1년간의 은둔기를 거친 뒤, 바그너의 마지막 유산인 페스티벌 재건에 나섰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에 바그너의 제자인 헤르만 레비, 한스 리히터 등 당대 최고 지휘자와 최고 수준의 성악가들이 참여함으로써 페스티벌은 최상의 예술적 무대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코지마는 음악감독 역할도 맡아 바그너 당시와 똑같이 무대를 재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음악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음악가를 위해 헌신한 아내들은 가정을 잘 돌보았을 뿐 아니라 동료로서 그들이 음악세계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그들의 유산이 현대까지 이어지는 가교역할을 했던 1등공신인 셈이다.
editor 심효진
words 조영훈 <리빙센스>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