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집과 낭만 27
영화 포스터를 집에 걸어둔다는 것
영화 포스터의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은 남아 있으니.
더는 사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나에게는 로고가 지나치게 크게 새겨진 옷이 그렇다. 나도 한때 ‘로고 플레이’를 잔뜩 펼쳐놓은 옷을 좋아했다. 1990년대에는 마리떼 프랑소아 저버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목이 늘어나도록 입고 다녔다. 청바지에도 마리떼 프랑소아 저버의 로고가 있었다. 조금 부끄러운 부분에 로고가 있었다. 사람들이 나의 그곳을 들여다보게 만든 그 회사의 로고 플레이 방침이 약간 의아하긴 했다. 생각해 보니 엉덩이 부위에 역삼각형 로고가 있는 게스 청바지도 즐겨 입었다. 1990년대는 한국인들이 로고의 중요성을 깨달은 아마도 첫 번째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팬티에도 자기 이름을 새긴 캘빈클라인의 대담함은 일종의 시대정신이었을 것이다.
나도 젊은 시절 내내 로고를 입었다. 젊은 시절에는 로고가 꽤 중요하다. 돈을 그리 잘 벌거나 취향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시절이 아니기 때문에 뭔가 값비싼 것을 사면 응당 로고가 있어야만 했다. 나는 꼼데가르송을 좋아했다. 검은색 축융 재질로 만든 근사한 꼼데가르송옴므의 옷은 로고가 없으므로 일단 패스였다. 지나치게 비싼 데도 로고가 없다니! 그 대신 눈 달린 하트가 그려진 꼼데가르송 플레이 라인의 옷을 입었다. 가슴팍에 뭐라도 달려 있어야 안심이 됐다. 사실 럭셔리 브랜드는 로고 플레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로고 플레이는 어디까지나 중저가 의류 브랜드의 홍보 방식으로, 럭셔리 브랜드는 브랜드를 감추고 디자인과 재질로 승부하는 게 원칙이었다. 2000년대 후반 혹은 2010년대가 오면서 그런 원칙도 끝이 났다. 발! 렌! 시! 아! 가!를 외치는 티셔츠와 구! 찌!를 외치는 바람막이를 입은 친구들로 가득한 시대다.
아니다. 나는 로고 플레이를 비난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티셔츠 한 장에 50만원에 달하는 거액을 지불했을 때는 “내가 이 옷에 얼마를 들였는지 알아?”라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일도 필요하다. 아니, 그냥 하얀 티셔츠를 50만원에 구입하면 그게 유니클로 티셔츠와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이 옷 한번 만져보실래요? 재질이 끝내주죠?”라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말이다. 물론 그래서 진짜 부자들은 브루넬로 쿠치넬리나 로로피아나를 입는다는데, 그거야 부자들이나 가능한 소비다. 솔직한 말로 로로피아나의 100% 비쿠냐 스웨터와 유니클로의 캐시미어를 아주 살짝 섞어 놓고 ‘캐시미어!’라고 홍보하는 스웨터를 구분할 사람은 세상에 몇 없다.
다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 로고 플레이가 조금 민망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40대에 들어서야 로고 플레이가 약간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가슴팍에 질! 샌! 더!라고 외치는 티셔츠를 입고 나갔다가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옷이 아니었다. 옷이라기보다는 브랜드 게시판이었다. 길거리를 지나치는 모든 사람이 내 가슴팍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MBTI가 저주받은 INFP인 사람이다. 남의 눈을 굉장히 의식하는 성격이라는 소리다. 누군가는 분명히 내 가슴을 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티셔츠 한 장에 돈 많이 들인 티를 저렇게 꼭 내야 직성이 풀리나 보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거 분명히 짝퉁일 거야. 저렇게 생긴 자가 진짜 질샌더를 입고 다닐 리 만무하지.” 나는 로고 플레이를 버렸다. 이미 구입한 옷들은 모조리 당근마켓에서 팔았다. 로고가 큼지막한 옷은 당근마켓에서 특히 잘 팔리는 경향이 있다. 제값 주고 사기 힘든 학생들이 세컨드핸드 명품을 주로 노리기 때문이다. 첫 명품은 역시 로고가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친구들도 한 20년이 지나면 로고를 버릴 것이다.
더는 사지 않는 물건이 또 있다. 영화 포스터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영화광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는 <스크린>과 <로드쇼>라는 영화 월간지가 있었다. 그 잡지들을 사면 항상 배우의 브로마이드나 영화 포스터를 선물로 줬다. 나는 그렇게 받은 포스터들을 방 안에다 잔뜩 붙였다.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 뤽 베송 감독의 <그랑블루>, 장 자크 베넥스의 <베티블루 37.2>를 침실 벽에다 붙여 놓고는 희희낙락했다. 어머니는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싫어했다. 어머니의 꿈은 큰아들은 검사를 만들고 작은아들은 의사를 만드는 것으로써, 영화 따위에 목을 매는 큰아들의 취미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는 작은아들을 의사로 만드는 평생의 프로젝트에 성공했다. 슬프게도 큰아들은 영화평론가 따위의 직업을 갖게 됐다. 원래 꿈이란 건 다 이룰 수 없는 법이다. 반타작만 해도 성공이다. 그래서 한동안 어머니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검사 출신 모 정치인에게 열광했는데, 흠. 총선이 끝난 지금은 생각이 어떻게 바뀌셨는지 나도 모르겠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너무 깊이 알지 않는 게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다.
1990년대의 인테리어는 확실히 영화의 시대였다. 학교 앞에 막 생기기 시작한 카페들에는 3가지 인테리어 요소가 반드시 있었다. 테이블 위의 전화기, 헤이즐넛 커피 향, 그리고 영화 포스터였다. 삐삐 사용자를 위한 전화기는 핸드폰의 시대가 오면서 사라졌다. 헤이즐넛 커피 향도 진득한 에스프레소 향에 밀려 사라졌다. 영화 포스터는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거의 모든 카페에는 왕가위의 <중경삼림>이나 뤽 베송의 <그랑블루>, 그리고 한국인이 유독 좋아하는 <바그다드 카페>의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1990년대는 한국에서 ‘문화’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폭발하던 시기였다. 그 문화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영화였다. <씨네21>,<키노> 같은 영화 잡지들이 생기면서 모두가 영화관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영화를 이야기했다. 4000만의 취미가 영화 감상이던 시절이었다. 어쩌다 좀 귀한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는 카페를 발견하면 기분이 썩 좋아졌다. 나는 장 뤽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 포스터가 걸려 있던 카페를 특히 아꼈다. 아무나 좋아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카페 주인을 알지 못했지만 그 주인의 취향이 분명 내 영혼과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장 뤽 고다르를 아는 사람이라면 커피 맛도 분명히 프랑스식으로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프랑스가 사실은 커피가 더럽게 맛이 없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다.
1960년대는 사실 좀 희한한 시기였다.
솔 바스 같은 당대 최전방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영화 포스터를 만들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상업영화가 포스터 디자인 하나는
기가 막히게 뽑아냈다.
그 시절에는 좀 힙하게 꾸미는 사람들 집에도 항상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1990년대에는 집에 뭘 붙이고 할 게 별로 없었다. 바우하우스 디자인 포스터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다. 사람들의 취향이 지금처럼 세련되고 세밀하게 분화되기도 전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영화 포스터를 선택했다. 내 취향을 드러내면서도 집을 예쁘게 꾸밀 수 있는 유일한 아이템이었다. 내 집에도 2000년대 후반까지 영화 포스터가 항상 붙어 있었다. 물론 조금 다른 포스터들을 찾았다. 이를테면 이베이에서 구한 1960년대 <배트맨> TV 시리즈 포스터라거나, 혹은 칸영화제에서 구입한 1970년대 이탈리아 영화 포스터 같은 것들이었다. 왕가위의 <화양연화>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 같은 인기 있는 영화 포스터는 다른 친구들 집에도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같은 아이템으로 집을 꾸미면서도 뭔가 남들과는 다른 취향을 뽐내고 싶었다.
영화 포스터의 시대는 끝났다. 영화 포스터를 걸어놓은 카페는 더는 없다. 인테리어 잡지에 등장하는 근사하게 꾸민 집에도 영화 포스터는 없다. 영화라는 매체는 더는 세련되거나 힙한 취미의 대상이 아니다. 취미란에 ‘영화 감상’이라고 쓰는 행위는 나처럼 늙은 세대의 전유물이다. 사실 영화평론가라는 직업 자체가 멸종 위기인 탓에 나만 유독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다. 요즘 세상에 누가 영화를 진지하게 보고 그걸로 철학적 토론까지 하겠는가 말이다. 영화는 그냥 상품이 됐다. 상품 포스터를 집에 걸고 싶어 하는 사람은 더는 없다. 그래도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영화 포스터가 하나 있다. 마이클 케인이 주연한 1966년 작 <베를린 스파이>의 포스터다. 나는 아직도 그 포스터를 방 안 한구석에 세워놓고 매일매일 쳐다본다.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이 있는 포스터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는 사실 좀 희한한 시기였다. 솔 바스 같은 당대 최전방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영화 포스터를 만들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상업영화가 포스터 디자인 하나는 기가 막히게 뽑아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아니,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팁은 이거다. 이베이로 가시라. 그리고 1960년대 영화 포스터를 검색하시라. 당신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부끄러움 없이 벽에 걸 수 있는 아름다운 옛 시절의 포스터들이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특히 그 시절 폴란드에서 제작한 포스터들이 기가 막히다. 가격은 좀 비싸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시길 권한다.
김도훈@closer21
오랫동안 ‹씨네21›에서 영화기자로 일했고, <GEEK>의 패션 디렉터와 <허핑턴포스트> 편집장을 거쳐 «이제 우리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라는 책을 썼다. 평생(?)에 걸쳐 수집한 물건들과 아름다운 물건들이 공존하는 그의 아파트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김도훈 나라다.
editor 심효진
words 김도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