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요새 흙수저, 금수저 말이 많다. 나폴레옹이 금수저였다면 오히려 프랑스 영웅이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은 지난 2017년 판교 NS홈쇼핑 별관에서 열린 ‘나폴레옹 갤러리’ 전시회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당시 김 회장은 나폴레옹의 핵심 상징인 나폴레옹 이각모를 전시회에 내놨다. 그는 “이각모엔 나폴레옹의 긍정적 사고와 도전정신, 리더십이 담겨있다”며 “청소년이나 벤처사업가들이 나폴레옹의 이각모를 보며 영감과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 회장은 자신을 나폴레옹에 투영할 법하다. 외할머니에게 받은 병아리 10마리에서 시작해 자산 총액 17조원이 넘는 기업집단을 일군 과정이 “불가능은 없다”던 나폴레옹과 닮았다.
하지만 청년 세대에겐 ‘도전정신’을 강조하며 수저 무용론을 설파한 김 회장이 아들 수저는 금칠하기 바빴다는 비아냥 섞인 평가도 나온다. 장남 김준영 씨의 개인회사를 앞세워 우회적으로 그룹의 지배력을 확보하게 했다는 ‘편법 승계’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김 회장은 지난 2012년 준영 씨에게 하림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위치한 한국썸벧판매(현재 올품) 지분 100%를 증여했다. 올품은 하림그룹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성장했다. 올품을 중심으로 한 지배구조 개편 작업과 일감 몰아주기가 이뤄졌고 그 결과 준영 씨는 하림지주 지분 22.47%를 보유한 최대주주가 됐다.
준영 씨가 자산총액 10조원 이상의 그룹을 넘겨받으면서 납부한 증여세는 100억원에 불과하다. 증여세 마련 방식도 석연치 않다. 올품은 지난 2015년 유상감자로 주식을 소각하고 그 대금으로 증여세를 납부했다.
김 회장은 국적선사 HMM 인수전도 준영 씨의 실적 쌓기 무대로 만들어줬다. 2018년 하림지주 경영지원실 과장으로 입사한 준영 씨는 지난 2021년 HMM 인수 파트너인 JKL파트너스에 수석운용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JKL파트너스는 하림그룹과 다수의 인수합병건에 참여하며 오랜 협력관계를 구축해왔다. 준영 씨가 승계를 위한 업적을 쌓기에 최적의 환경인 셈이다.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이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반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프랑스어로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부른다. 단순 번역하면 ‘아름다운 시절’로 읽힌다. 전쟁과 혁명이 사라지자 산업과 문화가 발전하고 낙관적인 세계관이 자리 잡으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극심한 빈부 격차를 보인 때이기도 하다. 부르주아 계급이 물랭루주 등 사교장에 모여 노래와 춤을 췄지만, 노동자들은 주말도 없이 일을 해야 했다. 상위 10%가 부의 9할을 가져갔고 부의 대물림은 심화됐다. 나폴레옹 시대를 살았던 김 회장은 아들에겐 ‘벨 에포크’ 시대를 물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