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부·국정원 주최 산업보안컨퍼런스 진행···“기술탈취 타깃, 신종 수법 대응 미흡”
“R&D 센터 구축 요건 강화, 공익신고제 손질···자문중개 통합 관리 법률정비 필요”
[시사저널e=최성근 기자]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격화하면서 법규상 사각지대를 악용한 산업기술 탈취 시도가 증가하고 있다. 연구개발센터나 자문중개업체 등을 악용한 신종 기술 유출 수법은 현행법상 처벌이 어려워 제도 보완이 시급하단 지적이다. R&D센터에 대한 정부 조사권을 강화하고 자문중개업체를 통합 관리할 법령 손질이 필요하단 조언이 제기된다.
22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하면서 각국은 핵심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국은 중국 등 우려 국가에 대해 기술 수출 규제 강화하면서 우려 국가 관련 기업들은 해당 규제를 피해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첨단 기술을 보유한 우리나라로 진출을 시도해 기술을 획득하려는 유형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정부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12개 부문 국가전략기술과 15개 국가 첨단 전략기술 육성 계획을 수립했다. 또 국내 산업기술을 실질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법령 개정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있지만, 규제 사각지대를 노린 산업기술 탈취 시도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18년 20건, 2019년 14건, 2020년 17건, 2021년 22건, 2022년 20건 등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산업기술 유출은 꾸준히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고, 올해도 7월까지 11건이 발생했다. 국가핵심기술 유출도 최근 6년간 36건 발생했다. 우리나라가 산업기술 탈취의 주요 타깃이 되면서 대책이 시급하단 지적이 제기된다.
◇법 사각지대 악용 신종 기술탈취 수법 증가···“외국기업 R&D센터 조사권 강화 필요”
이날 산업통상자원부와 국가정보원 주최로 서울 강남구 그랜드 인터콘티넨탈 서울에서 열린 산업보안국제컨퍼런스에서는 산업계 기술 유출 실태와 보호 강화를 위한 제언, 정부 대책 등이 제시됐다.
현재 산업계에서 횡횡한 기술유출 유형으로는 타깃 업체 및 연구기관 내부에 유출 조력자를 심어 기술인력에게 해외기업으로 이직을 권고하거나 협력업체를 활용해 타깃 기업의 공정 정보를 우회해 획득하는 방법이 있다. 또 외국계 사모펀드나 투자기업에 인수합병(M&A) 규제 사각지대를 이용한 유출 수법도 일반적이다.
최근엔 국내 산업기술 보호에 대한 당국의 규제가 강화하면서 기존 방식의 기술 탈취에서 진화한 신종 기술탈취 시도도 늘고 있다. 한국에 R&D 센터를 설립하고 기업을 인수해 인력을 유출하거나 리서치 업체를 활용해 타깃 기업 정보를 수집·유출하는 방식, 공동연구의 리스크를 활용하거나 역설계를 적법한 수준에서 넘겨 기술유출을 하는 유형도 발견된다. 이러한 신종 수법은 현행 법령으로 규제, 처벌이 어렵다.
한국산업보안한림원 소속 최현선 현대모비스 매니저는 “법령에 정한 기술 탈취 행위가 아닐 경우 기술 탈취가 강하게 의심돼도 이에 대해 조사권을 발동할 권한이 없다. 외국 입법례와 같이 국가안보 관련 이익이란 포괄적인 이익을 침해한 행위에 대해 처벌 규정이 없다는 점도 문제점”이라며 “기술적, 경제적 가치가 높은 국가 핵심 기술이 아닌 지정이 되지 않는 기술은 해외로 이전 되더라도 이를 막기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외국 기업이 국내 기술유출 전진기지를 구축하는 대표적 방법은 R&D 센터를 설립하는 것이다. 기술개발을 빙자해 기술 인력을 유인하기 위한 명분으로 R&D 센터를 만든뒤 고액 연봉, 인센티브 등으로 유인하거나 특정업체 출신 우대 정책 등을 내세워 국내 연구인력을 흡수한다. 우리나라 유망기업에 투자를 하거나 아예 기업을 인수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기술탈취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다. 합법을 가장해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정상적 방법으로 기업을 인수한 후 내부적으로 은밀하게 기술 탈취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종업계 전직금지 약정을 체결한 퇴직 기술자가 다른분야 회사나 R&D 센터로 이직해 의도가 의심되더라도 막을 방법이 없다.
기술유출 전진 기지를 구축, 운영하는 각 단계별로 규제방안을 마련해 구축 자체를 까다롭게 하고, 운영 과정에서도 부정한 기술유출이 없었는지 모니터링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단 조언이다.
최 매니저는 “핵심 기술 보유 기업에 대해 외국인이 투자하거나, 해당 투자가 발생할 경우 안보 심의를 강화하고 외국 기업이 R&D 센터를 설립할 경우 구축 요건 자체를 까다롭게 해야 한다”며 “운영 단계에선 기술유출이 있거나 기술유출 우려가 있는 경우 뿐 아니라 기술유출 의심 정황이 확인돼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조사권을 발동할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기술 유출 의심 정황 신고를 장려하기 위해 공익신고자 보호법 등 관련 법률에 신고자에 대한 면책 등 보호규정을 세우고 이에 대한 포상제도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다만, 기술 유출이 강하게 의심돼 신고가 필요한 대표적 레드 플래그 예를 법령에 열거해 무분별하거나 악의적 신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는 추가 조치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컨설팅업체 통한 유출 속수무책···정부 “사각지대 보완, 기업 부담 낮출 것”
해외 자문 중개업체를 활용한 기술 유출도 대표적 신종 수법이다. 특정 분야 기술을 노리는 자문 의뢰자가 해외에 본사를 둔 자문 중개업체를 통해 국내 전현직 임직원에게 자문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기술을 얻어간다. 이때 자문 의뢰자와 국내 전문 인력 간 자문 과정에선 자문 중개업체조차 개입하지 않는 1대1 비공개 컨설팅 방식으로 진행한다.
기술 제공자에게 큰 부담이나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해 점차 자문 의뢰자가 필요한 핵심 기술에 관련된 질문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관여자들이 가명을 사용해 익명으로 자문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자문료 역시 차명 계좌를 사용해 추적이 어렵다.
자문중개업, 컨설팅업을 규제할 법률이 미진한 게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최 매니저는 “환경기술산업법과 기술산업진흥법이 환경 컨설팅, 기상 컨설팅 등 특수 분야 자문 업무는 규제하고 있으나, 자문 중개업체를 통한 컨설팅업의 기술 유출 방지 및 관리에 대해선 규제하지 않아 직접 규제를 할 수 없다”며 “자문 중개업을 총괄 관리 감독할 수 있는 근거 법률을 마련하고, 주무 부처를 명확히 해 통합 관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어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산업기술 유출 방지를 위해 제정된 산업기술보호법 등을 개정해 근거 규정을 추가하는 것이 보다 손쉬운 방법”이라며 “자문 중개업에 대한 관리 감독을 강화하고 각종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자문 의뢰시 자문 중개업체에 실명 확인 절차 이행 의무 부과, 관련 기록 보관 및 수사 정보기관 정보요청시 제공 의무 부여, 수시 감사 제도, 기술 유출 의심 정황시 자문 중개업체 및 의심정황 발견자의 신고 의무 부과 등이 필요하단 설명이다.
정부는 기술 유출 사각지대를 막고 기업부담을 낮추는 방향으로 제도개선에 나서겠단 방침이다. 안덕근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기술유출이 갈수록 다양화, 지능화되고 있다”며 “인수합병, 사모펀드 인력 빼가기 같은 다양한 기술 탈취 방법에 대해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을 통해 더욱 촘촘한 보호망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기업의 기술 보호 부담을 과감히 낮추겠다고 강조했다. 안 본부장은 “산업기술보호위원회의 심의 기간을 단축하고 서면심의 심사, 면제 등을 과감히 추진해 지켜야 할 기준은 지키되 기업의 과중한 행정 절차로 부담 갖지 않도록 하겠다”며 “업계와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