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 생보사, 경과조치 적용 전 자본건전성 기준치 미달
계약 3분의 1 해지 가정 시 충격 커···자본확충 해야
[시사저널e=유길연 기자] 최근 생명보험사들의 자본건전성이 고금리 경향 속에도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경과조치를 시행하지 않으면 새 지급여력비율(K-ICS·킥스)이 금융당국의 권고 수준을 크게 밑돌거나 겨우 넘긴 곳이 많았다. 킥스 시행으로 처음으로 측정하기 시작한 ‘해약 위험’이 크게 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기존 고객 가운데 3분의 1이 일시에 보험을 깨면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할 수 있는 능력이 크게 하락한다는 의미다.
◇'경과조치 아니면 어쩔 뻔'···킥스 권고치 미달 속출
11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NH농협생명의 경과조치 적용 후 킥스 비율은 325.5%를 기록했다. 하지만 경과조치를 적용하지 않으면 175.5%로 크게 낮아진다. 경과조치를 적용하지 않았다면 당국의 권고치인 150%를 아슬아슬하게 넘겼을 것이란 설명이다. 경과조치란 킥스의 일부 제도 도입을 미뤄주는 것이다. 금융당국이 새 제도의 원활한 도입을 위해 고안한 장치다.
킥스는 새 회계제도(IFRS17)에 맞춰 새로 마련된 지급여력비율 제도다. 지급여력이란 보험사가 예측할 수 없는 위기를 겪어 손실이 크게 불어나더라도 고객에게 보험금을 지급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이를 구체적인 숫자로 측정한 것이 킥스다. 자기자본(가용자본)을 요구자본으로 나눠 산출한다. 당국은 150%를 넘기도록 권고하고 있으며 법정 기준치는 100%다.
경과조치를 적용하지 않으면 킥스가 당국의 권고치를 겨우 넘기거나 만족시키지 못한 경우는 주로 생보사에서 나타났다. 농협생명 외에 대형사 가운데선 교보생명이 156%로 당국의 권고치를 가까스로 넘겼지만 경과조치 적용으로 232.4%를 기록했다. 흥국생명은 원칙대로 산출하면 당국 권고치를 크게 밑도는 105.4%를 기록했지만 경과조치 후엔 152.7%로 올랐다.
중소형 생보사들은 대부분 경과조치 전 킥스 비율이 권고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매각을 앞둔 KDB생명은 47.7%로 권고수준보다 100%포인트 넘게 차이났다. 푸본현대생명은 아예 마이너스(-)0.6%였다. IBK연금보험은 68.65%, 하나생명은 117.4%를 각각 기록했다. DGB생명만이 158.5%로 권고치를 겨우 넘겼다.
업계에선 킥스의 충격이 예상보다 더 크다는 의견이 나온다. 당초 새 회계제도(IFRS17)와 킥스는 보험부채를 시가평가하기 때문에 금리가 오르면 킥스에 대한 부담도 덜어질 것이란 예상이 우세했다. 하지만 시중금리가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도 킥스를 원칙대로 적용할 경우 자본건전성 악화로 어려움을 겪을 뻔했던 보험사가 여럿 나온 것이다.
◇'외환위기' 수준 충격 시나리오···해약위험, 금리위험 버금가는 ‘부담’
킥스를 원칙대로 도입하면 보험사들의 자본건전성이 악화되는 이유 중 하나는 ‘해약 위험’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생보사들의 해약위험액은 보험사들의 '아킬레스건'으로 통하는 금리리스크 만큼 큰 것으로 나타났다. 생보사들은 경과조치 적용으로 해약위험액을 반영하지 않은 덕분에 자본건전성 부담을 그나마 덜어낸 것이다.
올해 도입된 킥스는 기존 제도(RBC)에서는 측정하지 않은 해지·사업비·장수·대재해위험 등이 새로 추가된다. 이 중 해약위험은 보험사가 보유한 보험계약 중 30%가 일시에 해지되는 시나리오(혹은 옵션행사율이 35%가 되는 경우)를 가정하고, 이 때 보험사의 자본(순자산)이 얼마만큼 줄어드는지를 측정한다. 과거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보험 해지율이 약 30%이기에 이러한 시나리오를 선택한 것이다.
실제로 농협생명의 올해 3월 말 기준 해약위험액은 2조260억원으로 전체 위험액의 42%를 차지했다. 금리위험액 다음으로 많은 규모다. 교보생명의 해약위험액은 3조7326억원(41%)으로 전체 위험액 중 가장 컸으며 흥국생명도 1조549억원(48%)으로 가장 많았다. 중소형사 중에선 KBD생명은 5313억원(34%)으로 두 번째로 많았고, DGB생명(54%)은 3120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IBK연금보험, 푸본현대생명, 하나생명은 전체 위험액 가운데 해약위험이 차지하는 비율은 낮았지만, 규모 자체는 금리위험액 다음으로 많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해약리스크는 보험사가 이익 비중이 큰 우량계약을 많이 맺을수록 더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보험사 입장에서 손해를 보고 있는 보험계약을 고객이 깨면 오히려 이익이지만 반대로 이익 계약이면 해약으로 인한 보험사의 타격은 커진다. 보험사들이 새 제도 아래서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보장성보험을 많이 판매할수록 해지위험도 덩달아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보험사들이 자본확충을 계속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향후 금리가 내림세로 돌아서 자기자본이 줄어들고 금리위험액이 커지면 보험사들은 더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종자본증권, 후순위채 등 자본성증권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증자 규모를 늘려 자본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금리 하락시에는 해약리스크가 다소 줄어들 수 있어도 금리리스크는 늘어난다”라며 “결국 모든 경제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선 자본확충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