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정부 부당 개입···‘청탁-뇌물’ 사실관계 확정
엘리엇 “윤석열·한동훈 수사로 관료-재벌 유착, 소수주주 손실 확인” 압박

서울 서초구 삼성물산 사옥/ 사진=연합뉴스
서울 서초구 삼성물산 사옥. / 사진=연합뉴스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한국 정부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에 약 690억원(이자 포함 130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국제중재기구 결정이 나왔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한 책임자들에게 우리 정부가 구상권을 청구할지 주목된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는 전날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약 690억원)와 지연이자의 지급을 명했다. 지연이자는 2015년 7월16일부터 판정일인 올해 6월20일까지의 기간으로 5% 연복리로 계산된다.

중재판정부는 또 엘리엇이 정부에 법률비용 345만7479.87달러(약 44억5000만원)를 지급하고, 정부는 엘리엇에 법률비용 2890만3188.90달러(약 372억5000만원)를 지급하도록 명했다. 배상금과 지연이자, 법률비용을 모두 합하면 정부가 지급해야 하는 액수는 약 1300억원이다.

행동주의 펀드인 엘리엇은 2015년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을 발표하자 삼성물산 지분 7.12%를 취득한 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비율(1:0.35)이 삼성물산에 불리하다며 합병에 반대했다. 하지만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였던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며 합병안은 통과됐다.

이후 엘리엇은 2018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며 7억7000만달러(약 9925억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국정농단 특검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두 회사의 합병을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씨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2017년 2월 기소하자 이를 기회로 삼은 것이다.

정부의 향후 대응에도 관심이 쏠린다. 정부는 결정문을 분석한 후 구체적인 대응 방침을 밝힐 예정이다. 최근 3000억원 배상이 결정된 론스타 ISDS처럼 불복 절차를 진행하거나, 엘리엇에 1300억원을 배상한 후 관련 책임자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선택지도 있다.

구상권 청구 대상으로는 부정한 청탁과 함께 뇌물을 주고받은 혐의가 대법원에서 확정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이 거론된다. 또 국민연금공단이 합병을 찬성토록 압박한 혐의가 확정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도 고의와 과실 정도에 따라 구상권이 청구될 여지가 있다.

국제통상전문가 송기호 변호사(법무법인 수륜아시아)는 “국제중재판정은 최종심으로 더 이상 중재절차에서는 다툴 수 없다”며 “론스타 패소 대응처럼 ‘무효 소송 충분한 승산’ 식의 오류를 반복하지 말고 박근혜, 이재용씨 등 책임자들에게 구상권 청구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란 다야니 사건 패소로 800억원, 론스타 3000억원, 엘리엇 1300억원 등 세금으로 지급해야 할 금액은 5000억원 이상”이라며 “정부의 ISDS 패소 사건 대응을 근본적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엘리엇도 이날 입장문을 통해 우리 정부의 배상 이행을 압박했다. 엘리엇은 “본 건 사실관계는 대한민국의 법원 및 검찰에 의해서 이미 지난 수년간 입증되고 널리 인정됐다. 정부 관료와 재벌 간의 유착관계로 소수 주주들이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이는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검찰 재직 당시 수사 및 형사 절차를 통해 이미 입증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중재판정에 불복해 근거 없는 법적 절차를 계속 밟아나가는 것은 추가적인 소송 비용 및 이자를 발생시켜 대한민국 국민의 부담만 가중시키게 될 것”이라며 “엘리엇은 대한민국이 이번 중재판정 결과에 승복하고, 중재판정부의 배상 명령을 이행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한 ISDS는 현재 5건이 진행 중이다.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문제 삼은 미국계 헤지펀드 ‘메이슨’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2억 달러(한화 2500억원) 규모의 투자자·국가 간 소송을 진행중이다. 합병 당시 메이슨은 삼성물산 지분 2.18%를 보유했다.

2018년 10월에는 스위스에 본사를 둔 승강기업체 ‘쉰들러 홀딩 아게’가 현대엘리베이터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봤다며 우리 돈 2400억 원 규모의 ISDS를 제기했다. 2013~2015년 현대엘리베이터 유상증자와 전환사채 발행이 사주 일가 경영권 강화 차원에서 이뤄졌는데도, 우리 정부가 조사·감독 의무를 게을리해 자신들이 3억 달러 이상 손해를 봤다는 주장이다.

이란계 다국적 기업 엔텍합 그룹을 소유한 다야니 가문이 우리 정부의 배상금 지급 지연을 문제 삼으며 제기한 두 번째 ISDS, 중국인 투자자와 한 미국 국적 투자자 등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낸 ISDS도 진행 중이다.

현재 우리 정부에 중재의향서를 내고도 정식 중재 제기를 하지 않은 사건도 8건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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