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선택 기준 1위로 부각된 ‘워라벨’···일과 생활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핵심
"주식 등 투자에 대한 접근성 좋아지며 노동 소득 중요성 점차 낮아져"
[시사저널e=엄민우 기자] 직장인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삶의 가치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달라지면서 선호하는 기업에 대한 기준도 함께 바뀌고 있다. 연봉도 중요하지만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을 침해하는 연봉은 기꺼이 포기하고 말겠다는 것이 최근 젊은 직장인들의 직장 선택 기준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 10일 여론조사기관 모노리서치에 의뢰, MZ세대 82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가장 들어가고 싶은 기업은 ‘워라벨이 보장되는 기업’(36.6%)’인 것으로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강조돼 오던 워라벨의 중요성이 전통적으로 직장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던 ‘월급(29.6%)’이나 ‘정년보장(16.3%)’ 마저 역전한 것이다.
실제로 젊은 직장인들은 직장선택을 함에 있어 워라벨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월급을 더 주면 움직인다’는 생각으로 직장생활을 하던 때와는 선택 기준 자체가 달라졌다. 심지어 워라벨 때문에 연봉을 낮추는 경우도 있다. 한 외국계 기업 6년 차 사원 이 아무개씨는 “이전 직장의 워라벨이 너무 안 좋아 연봉을 낮추고 이직했다”며 “지금은 보통 8시부터 일하고 5시에 퇴근해 운동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낸다”고 전했다.
30대 초반의 한 대리급 직장인은 “일과 삶의 분리가 어렵고, 삶에서 업무의 비중이 과도한 정도가 한계점에 이를 때마다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며 “(이직 고려 시)타 직장의 복지, 개인 시간 확보, 상대적으로 낮은 업무강도 등이 검토하게 되는 요소”라고 전했다.
또 다른 31세 외국계 금융권 직장인은 “야근, 주말 출근 등이 없고 퇴근 후 취미생활 등에 지장이 없어서 워라벨에 만족해 이직을 고려해본 적 없다”고 말했다.
세대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수입은 직장인들에게 중요한 고려 요소다. 치솟는 집값, 물가 등 경제적 부분이 중요하게 부각됨에도 불구하고 ‘워라벨’이라는 부분이 월급보다 주 고려대상으로 떠오르는 주된 이유는 돈을 꼭 직장으로만 벌어야 한다는 인식이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PD 직군의 한 33세 직장인은 “예전엔 일부 소수만 했던 주식 투자나 부동산 투자 같은 것도 시중에 정보가 많아지고, 인터넷도 발달해 접근성이 좋아졌다”며 “노동을 통해서 얻는 소득이 실질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시대인 거 같다”고 전했다.
워라벨이 좋지 않으면 어차피 퇴사하게 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워라벨 좋은 회사 다니는 것이 오히려 경제적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 MZ세대 직장인은 “돈도 돈이지만 워라밸이 좋아야 근속 연수가 길어진다고 생각한다”며 “워라밸이 좋은 직장을 오래 다니며 꾸준히 버는 것이 1~2년 높은 연봉을 받고 빨리 퇴사하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이득이라는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젊은 직장인들이 워라벨을 중요시 여긴다는 것이 대충 일을 하거나 성과를 등한시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대기업 과장급 인사는 “최근 개그 프로나 언론기사에서 MZ세대가 무책임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극소수고 대다수는 자기 일은 제대로 한다”고 전했다.
다만 야근, 연차 사용의 어려움 등 회사와 관련 없는 자신만의 시간을 활용하는데 있어 영향을 받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분위기가 강해진 것이 워라벨 문화의 핵심이었다. 일과 개인의 삶 영역이 완벽히 분리돼야 하고, 서로 불필요한 간섭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업들의 문화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13일 삼성증권을 찾아 “열정적으로 일하고 쉴 때는 가족, 지인들과 편안하게 쉬자”며 직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대표기업 오너까지 나서서 워라벨을 강조하고 다니는 형국이다.
한 10대 그룹 임원은 “수 십년 간 이어져 온 관습이 있지만, 매년 새로운 직원들이 들어오는 만큼 문화가 빠르게 바뀌어 나간다”며 “지금은 오래 직장생활을 한 사람들도 그런 문화에 적응해가고 있다”고 전했다.
한 4대 그룹 과장급 인사는 “요즘은 장기휴가는 물론, 심지어 본인이 필요하면 당일에 휴가를 내기도 하고 이에 대해 나는 물론 부장도 아무런 코멘트도 하지 않는다”며 “서로 피해를 주지 않으면 된다는 분위기로 최근 몇 년 새 회사 문화가 확 바뀌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