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시중은행에 채안펀드 투자 주문
올해 결산배당 늘려도 용인해줄 가능성
[시사저널e=유길연 기자] 시중은행이 금융시장 안정화에 또 투입되자 은행권의 주주환원 확대에 대한 금융당국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당국은 그간 경기 침체에 대비해 은행권은 배당 확대와 자사주 매입을 자제하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은행을 동원하게 되자 ‘당근책’으로 주주환원에 대한 입장을 완화할 가능성이 있다. 당장은 금융시장 혼란이 심해 주주환원 확대를 논하기 어렵지만, 내년 초 은행권이 결산배당 규모를 늘려도 당국이 용인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27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금융감독원 및 5대 시중은행 부행장(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과 함께 전날 '제2차 은행권 금융시장 점검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은행들은 단기자금시장 및 채권시장 안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약속했다. 구체적으로 은행은 기업어음(CP), 자산유동화증권(ABCP), 전자단기채권 매입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채권시장안정펀드(이하 채안펀드)에 필요할 때마다 자금을 투입(캐피탈 콜)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같은 날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시중은행장을 만나 시장에 자금 공급을 늘려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은행장들은 협력을 약속하면서 시장 안정화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한은으로부터 은행채를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은행은 단기자금 활용 용도로 한국은행을부터 대출을 받을 수 있는데, 그간 담보물에 포함되지 않았던 은행채를 넣어달라는 의견이다.
금융시장이 혼란스러워지자 금융권 ‘맞형’격인 시중은행이 또 투입된 셈이다. 최근 '레고랜드 사태'로 채권시장의 투자심리가 크게 얼어 붙으면서 증권사, 카드사 등 제2금융권 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들도 자금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 2020년에도 코로나19 확산으로 금융시장이 요동치자 당국은 시중은행을 동원한 바 있다. 시중은행은 증권시장안정펀드, 채안펀드에 자금을 투입했다. 당시 시중은행의 모기업인 5대 금융지주는 두 정책 펀드에 총 10조원을 쏟아부었다.
금융권에선 향후 은행권의 배당에 대한 금융당국의 정책 방향이 바뀔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당국은 금융시장 안정화를 위해 잇달아 시중은행에 손을 내민 만큼 ‘당근’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고려해 은행권이 주주환원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 지금보다 더 자율성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금융지주에 당장 중요한 주주환원 정책은 내년 초에 결정할 올해 결산배당이다. 금융지주가 결산배당 규모를 크게 늘려도 당국이 별다르게 문제삼지 않을 수 있다는 예측이다.
그간 금융당국은 은행권의 주주환원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2020년에 배당을 줄이라고 요구했다. 지난해에도 배당성향을 2019년 수준으로 맞추라고 지침을 직접 전달했다. 올해도 배당 확대와 자사주 매입 등을 자제하라는 입장을 줄곧 유지했다. 경기침체 우려가 큰 만큼 자본유출을 줄여 손실흡수력을 끌어올리라는 주문이다.
그런데 이달 진행된 신한금융의 자사주 매입 당시부터 금융당국의 은행권 주주환원 정책에 대한 미묘한 태도 변화가 감지됐다. 자사주 매입은 자본 감소를 불러와 금융지주의 자기자본비율 하락을 초래하기에 기존 금융당국의 입장과 반대되는 정책이다. 하지만 당국은 신한금융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금융지주가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과했다면 배당 및 자사주 매입도 가능하다”라며 주주환원에 대해 완화된 의견을 밝혔다.
주요 금융지주는 주주환원 규모를 확대하기 위한 의지가 강하다. 최근 열린 3분기 실적발표회에서 주요 금융지주들은 배당 확대 뿐만 아니라 자사주 매입도 추가로 진행할 계획도 밝혔다. 특히 신한금융과 리딩금융 전쟁을 벌이는 KB금융은 올해 배당성향을 올린 것이란 구체적인 방침을 제시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현재는 금융시장의 혼란이 너무 심해 금융당국, 은행권 모두 주주환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라며 “다만 내년에 금융지주가 결산배당을 늘리는 쪽으로 결정해도 당국이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