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입장서 하청업체 경영 관여하면 ‘불법파견’
근로 관련 협상 관여 안 하면 “협상테이블 나와야” 압박
관여해도, 안 해도 문제인 현재 하도급 시스템···“관련 법 개정 쉽지 않아”
[시사저널e=엄민우 기자] 산업계 대표적 고용 형태 중 하나인 하청 문제와 관련한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원청인 기업 입장에선 관여를 해도, 혹은 하지 않아도 문제에 직면하는 상황이다. 재계에선 사실상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경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우려가 나온다.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 노조 화물연대 조합원들은 23일 현재 서울 강남구 하이트진로 본사를 점거한 채 고공농성 중이다. 이들은 하이트진로 주류를 운반하는 화물차 기사들로 운송료 30%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하이트진로가 엄밀히 말해 이들을 고용한 주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기사들을 고용한 곳은 수양물류라는 업체다. 하이트진로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긴 하지만 경영이 분리돼 있는 엄연히 다른 법인이다.
노조는 하이트진로가 직접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회사 측은 난감해 하고 있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원청인 우리가 하청기업 연봉협상에 직접 관여하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심지어 공정거래법상 불법행위”라고 토로했다. 수양물류와 화물기사 간 협의해야 할 사안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청업체 임금협상과 관련해 원청 위치에 있는 기업들이 갈등을 빚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는 원청인 대우조선해양이 교섭에 나서야 한다며 거제 옥포조선소 1도크를 점거한 바 있고 현대체절, CJ대한통운도 모두 하청업체 직원들 문제로 홍역을 겪었다. 문재인 정권 시절 중앙노동위원회는 현대제철, CJ대한통운이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교섭상대로 나서야 한다고 결론 내렸고 두 기업은 이에 반발해 행정소송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김철희 한국경영자총협회 노사관계지원팀장은 “당시 지방노동위원회 결정과 달리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두 기업이 협상대상으로 나서야 한다고 결론 내렸지만, 대법원 판례는 원청을 협상주체로 보지 않고 있다”며 “원청 회사가 하청 회사 직원들을 지휘감독 하거나 협상테이블에 나올 경우, 중간에 있는 업체는 위장도급이 되고 불법파견 논란까지 부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원청기업들은 노조로부터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지만 근로계약서상 이들의 고용 주체가 아니다.
하이트진로 사례와 별개로 기업들 곳곳에서 해당 문제로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금호타이어에선 공장에서 일하는 조리원 5명이 금호타이어부터 직접 업무지시를 받았다며 정규직으로 고용해줄 것을 주장하고 있다. 포스코도 ‘업무지시’를 이유로 불법파견 판결을 받았다. 현대모비스는 최근 제조 부문을 분리해 자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는데, 이를 놓고 불법파견 논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이처럼 관여해도, 안 해도 문제인 현재 하도급 시스템 때문에 기업들은 불확실성 속에서 경영을 해야 하는 처지다. 제조업은 파견을 못하도록 막아놨기에 사실상 하청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한데, 하도급 계약이 곧 리스크로 이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김용춘 전국경제인연합회 고용정책팀장은 “외국은 대부분 업종의 파견을 허용하고 있는데, 우리는 가장 필요한 제조업에서 금지하고 있다”며 “파견은 못하게 하면서 하청은 강한 규제로 자칫 불법파견이 되는 구조여서 기업 입장에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법개정 등이 쉽진 않아 보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