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값 45년 만에 최대 폭락···“정부 방조시 투쟁” 농민 위기감 고조
정부 시장격리·소비촉진책 미흡 지적···“격리조치 의무화 입법 필요”
[시사저널e=최성근 기자] 최근 쌀값 급락으로 농업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정부는 소비 활성화와 시장 격리 등 대책을 내놓고 있으나 뒷북 대책이란 지적이 나온다. 특히 쌀 공급 과잉 대책으로 거론되는 밭작물로의 전환은 정부가 농민들에게 수익이 기대되는 대체작물을 자신 있게 제시하지 못하는 한 성공하기 쉽지 않단 진단이다.
17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최근 글로벌 인플레이션 여파로 국내 물가도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으나 쌀값은 약세를 거듭하며 폭락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현재 쌀값은 20kg 기준 한 포대 가격이 4만원 대 초반으로 지난해 같은 시기에 비해 20% 이상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45년 만에 최대 하락폭이다. 업계는 올가을 햅쌀이 본격적으로 나오면 쌀값 하락세는 더욱 커질 수 있단 관측을 내놓고 있다.
물가는 오르는데 쌀값만 떨어지면서 그렇잖아도 도시 근로자에 비해 소득 증가가 부진한 농민들의 어려움이 더욱 가중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2007~2010년 도시 근로자 가구 소득은 연 평균 3.9%씩 증가했으나 농가소득은 2.7%씩 늘어나는 데 그쳤다. 농민단체들은 가격 폭락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수확기를 앞둔 현 시점에 쌀값 안정책을 마련하는게 시급하다며 정부가 방관만 할 경우 행동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측은 “농업현장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정부의 정책 실패가 반복될 것이란 불안이 커지고 있다”며 “정부가 대책 없이 쌀값 하락세를 방조하면 쌀 농가는 생존권 사수를 위한 투쟁으로 맞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는 일단 시장 격리조치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수확한 쌀 과잉공급분 27만여톤을 두 차례에 걸쳐 매입해 시장에서 격리한 데 이어 지난달부터는 10만톤을 추가로 매입하고 있다. 쌀 소비 확대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우리나라 1인당 쌀 소비량은 1990년 119.6kg에서 2020년 57.7kg으로 30년 만에 51% 감소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농협과 소비자단체 등과 협력해 쌀 소비 활성화에 적극 나선단 계획이다. 18일 쌀의날을 맞아 쌀가공품 품평회 상위 제품 소개 등 이벤트를 진행하고, 농협도 쌀 나눔 행사, 특판전 등을 연다. 아울러 밀이나 콩 등 타작물 재배 확대를 추진하고 분절미를 활용한 쌀 가공산업 활성화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겠단 계획이다.
하지만,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단 지적이 나온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는 최근 농식품부 업무보고에서 적절한 시점의 시장격리, 역공매 방식 개선, 공공비축량의 국내산 쌀 전량 충당 등의 의견을 제시했다.
정부가 격리조치 시행 시기를 제대로 잡지 못한단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제도상 미비점도 한 요인이란 지적이 나온다. 서삼석 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지금 양곡관리법상 격리 조치가 임의규정으로 돼 있다보니 격리 시점을 지체하는 문제가 있었고, 격리시점이 지체되다보니 선제적 대응이 어려웠다”며 “선제적 대응이 되지 않으면 수급문제, 가격을 잡을 수 없다. 이미 하락세가 완연한 상황에서 격리한다고 효과가 있진 않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도 격리 요건을 위한 법상 요건을 충족해 정부에 격리 조치를 요청했으나 하지 않아 결국 이 사단이 난 것”이라며 “양곡관리법을 개정해 시장 격리를 좀 더 강제적, 의무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한 상태”라고 말했다. 서 의원은 농민들이 본인 귀책사유가 아닌 자연 재해로 생산량이 감소하면 국가가 보상하는 법안과 생산비 보장 법안도 각각 대표 발의했다.
정부는 쌀값이 폭등하자 밀과 콩 등 밭작물 재배 전환을 적극 유도하겠단 방침을 제시하고 있으나 업계에선 쉽지 않은 사안이란 분석을 내놓는다. 업계 관계자는 “이걸 시행하려면 정부가 농민들에게 어떤 농사를 지어야 소득을 많이 얻을 수 있는지 답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이런게 전혀 없다”며 “지금은 쌀이 문제지만 예전에 쌀이 잠잠했을 땐 밭작물인 양파, 마늘, 양배추 등이 가격 급등락으로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쌀에서 밭작물로 옮겨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분석이다.
이 관계자는 “농사에 있어 품목을 추천할 정도의 작물다양성, 그걸 확보해야 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 헌법에 수급 균형이나 농업인 이익 보호에 대해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다”며 “농민들이 쌀 농사를 짓는 이유는 그나마 소득이 되기 때문인데 다른 작물을 농사질 때 소득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누가 옮겨가겠나”라고 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쌀농사를 밭농사로 전환하고자 한 건 예전부터 있었지만 당시 밭농사로 바꿨던 사람들 중 70~80%는 10년 내에 다시 쌀농사로 돌아오는 형편”며 “운 때만 맞으면 쌀농사로 많이 벌 수 있단 인식이 있다 보니 쌀농사로 몰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보조금만 받고 몇 년 밭농사 짓다 다시 쌀농사로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문제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