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시간 유연화 기업과 노동자 인식차 커
노사 합의 강조했지만 협상할 노조 없어
[시사저널e=이하은 기자] 윤석열정부가 주52시간제 개편에 나서며 주 단위로 제한한 연장근로 시간을 한달 단위로 관리하는 방안을 마련키로 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기간도 확대한다. 포괄임금제로 갈등을 빚었던 IT업체 노동계 반발이 예상된다.
23일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정부세종청사에서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향’ 브리핑을 열고 현재 주 단위로 관리하는 연장 근로시간을 노사 합의로 월 단위로 관리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현행 주52시간제에 대해 “IT·SW 분야 등 새로운 산업이나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며 “지난해 4월 유연근로제를 보완했지만, 활용률은 10%에도 못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연간 근로시간은 1928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582시간보다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 주 52시간 유연화 개정 본격화
정부는 근로시간 제도에서 현재 연장 근로시간을 1주 단위에서 한달 단위로 관리하는 ‘총량 관리단위 방안’을 마련한다. 현행법상 1주 근로시간은 40시간에 연장근로 12시간을 더한 52시간이다. 연장근로를 시행하면 한달 동안 1주 평균 연장근로시간을 12시간으로 계산한다. 한달 기준으로 평균을 내기 때문에 특정 주에 12시간 이상 연장근로를 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독일의 경우 6개월 동안 주 평균 48시간을 준수하는 범위에서 1일 2시간의 연장근로를 허용하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는 1주 35시간을 원칙으로 3개월 평균 주 44시간 이내로 운영고 있다.
총량 관리단위 방안은 법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다. 정부는 실태조사 및 전문가와 노사 의견을 수렴해 올해 하반기 근로시간 제도 개선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실근로시간 단축과 근로자 휴식권 강화 등을 위한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도 도입한다. 근로시간계좌제는 저축계좌에 초과근무시간을 저축해두고, 휴가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이 장관은 “연장·야간·휴일근로를 저축했다가 나중에 몰아서 쉴 수 있기 때문에 실근로시간 단축으로 이어진다”며 “적립 근로시간의 상·하한, 적립 및 사용방법, 정산기간 등 세부적인 쟁점사항을 살펴 제도를 설계하겠다”고 말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기간도 확대할 방침이다. 선택적 근로시간제는 1개월 정산기간 내 주 52시간을 초과하지 않은 범위에서 근로자가 근무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제도다. 주로 IT·게임업계에서 활용하고 있다. 현재 연구개발 분야만 3개월로 제한됐지만, 정산 기간을 확대하는 것을 검토한다.
IT·게임업체 주무부처인 문체부도 정부의 노동개혁에 보조를 맞출 전망이다. 앞서 문체부는 주 52시간을 탄력적으로 적용 등을 위해 제1차관 주재로 규제혁신 전담조직(TF)을 구성한다고 밝혔다.
◇ 크런치모드 부활·기업간 양극화 우려
주52시간 개편이 본격화되자 IT·게임 업계에선 ‘크런치 모드’ 부활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근로시간을 노조합의로 결정한다고 했지만, 대부분 IT게임 기업은 노조가 없다. 노조가 있는 기업은 네이버, 카카오, 한글과컴퓨터, 넥슨, 스마일게이트, 웹젠 정도다.
이에 노조를 갖춘 일부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간의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란 지적이다. 대형 게임사에 비해 중소형 게임사는 여전히 고강도 업무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유연근무제는 노동시간 양극화를 부추길 수 있단 것이다. 콘진원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5인 미만 게임사 소속 노동자들 중 48.3%가 크런치 모드를 경험한 반면, 300인 이상 게임사의 경우 0.5%로 극히 낮았다.
차상준 스마일게이트 노조 지회장은 “크런치 모드는 당연히 부활할 수밖에 없다”면서 “정부는 ‘쉴 때 쉬어야 된다’고 하는데 실제로 일이 많은 직원에게 몰리게 된다. 맨먼스(Man/Month)로 모든걸 해결 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사 갈등도 불가필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유연근로제 및 선택근로제에 대해 노사 합의를 강조했다. 과도한 근로시간으로 인한 건강권 침해를 걱정하는 노동계의 반발이 큰 사안이어서 합의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게임산업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노동시간 유연성 확대에 대해 기업은 56%가 찬성한 반면, 노동자는 11%만 긍정적으로 답해 인식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게임업체는 52시간 근무제가 생산성을 악화하는 원인으로 보고 있다. 2018년 52시간 근무제 도입 이후 신작 출시 속도가 느려지면서 중국에게 추격을 혀용했다는 것이다. 지난달 중소벤처기업부가 개최한 간담회에서 IT·게임 기업 대표들은 “다른 업종에 비해 업무 특성상 유연한 근로시간이 필요함에 따라 인력난을 겪고 있다”며 유연화를 강조했다.
IT·게임 노동계는 노동개혁안에 노동자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배수찬 넥슨 노조 지회장은 “노동자에 대한 수렴 과정은 전혀 없다는 게 아쉽다. 일부 노동자들의 의견이라는 말도 결국 기업의 입장”이라며 “한쪽 이야기만 듣고 개현안을 마련했다는 생각”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