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소송 주체 수탁자전문위로 변경 논의···기업 역동적 투자 제약 우려
“상장 기업 통제, 연금 사회주의 부작용”···“책임 경영에 바람직” 의견도
[시사저널e=최성근 기자] 국민연금이 대표소송에 적극 나설 움직임을 보이면서 재계를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책임 투자 관점에서 바람직하단 의견도 나오지만 정부 통제를 받는 연기금이 기업경영에 관여하면서 기업의 역동적 투자에 제약요소로 작용할 수 있단 우려가 제기된다. 국민연금 개혁은 기금운용위원회를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독립시키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단 조언이다.
7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이달 말 기금위원회를 열고 대표소송 개시를 결정하는 주체를 기금운용본부에서 산하 수탁자 책임 전문위원회로 변경하는 지침 개정안 논의를 진행할 계획이다. 대표소송은 경영진이 내린 결정이 주주 이익과 어긋날 경우 주주가 회사를 대표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
정부는 2018년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고, 2019년 국민연금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2020년엔 국민연금이 기업에 이사 해임이나 정관 변경을 요구할 수 있는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다만, 국민연금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소송에 나서지 않았는데 국민연금이 대표소송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바꾸잔 취지로 지침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소액주주나 시민단체 쪽에서는 국민연금이 책임 투자 관점에서 주주권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오너나 경영 리스크로 인해 주주 가치가 훼손되면 국민 자산이 날아가는 것이기에 그런 측면에서 적극적 의사 결정은 당연히 필요한 부분”이라며 “국가 개입 측면 보다 국민 자산 손실 여부 측면에서 연기금이 주주로서 해야 하는 역할로 봐야한다”고 말했다. 기업이 여러 리스크로 손실을 볼 것 같으면 소송 등 의사 개진을 적극적으로 하는 건 필요하단 설명이다.
대표소송 주체를 기금운용본부에서 수탁자 전문위원회로 넘기는 부분에 대해선 “기금 운용 쪽은 다소 폐쇄적으로 움직이는 부분이 있는데 수탁자 전문위원회는 이해관계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 부분이 있기에 논의가 더 활발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계 쪽은 대표 소송을 제기한다면 국민연금은 우리나라 대부분 상장사들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기구가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날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로 열린 ‘국민연금 대표소송, 국민을 위해 바람직한가’ 토론회에서 권태신 전경련 부회장은 “세계 어느곳에서도 정부 지배하에 있는 공적 연기금이 자국 기업을 상대로 대표소송을 벌이고 기업 경영을 간섭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며 “기업들은 국민연금 기금 조성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데 국민연금의 경영개입을 별다른 방어 수단도 없이 감내해야 한다.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 구조개혁이 우선이라고 진단한다. 보건복지부 장관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지낸 최광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제도 운영에 책임을 갖고 있지만 기금 운용은 일체 관여하지 못하게 돼 있다. 기금운용본부장이 기금 운용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공단은 제도 관련 이사회와 기금운용 관련 이사회 등 두 개 이사회가 필요한데 기금운용위원회가 이사회 역할을 하고 있다. 기금운용위원회 이사장이 보건복지부 장관인 부분이 문제가 있단 지적이다. 최 명예교수는 “연기금 운용은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데 기금운용위원회 수장을 맡고 있는 복지부 장관이 무슨 전문성이 있나”라며 “정부는 심판 역할을 해야지 어설프게 선수로 뛰어선 안된다. 연기금 운용은 세계적 투자회사들과 경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탁자 전문위원회에 대해선 “위원회가 우리나라 최고 전문가로 구성돼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현재 위원들은 기금 운용이나 경영 전문가라 보기 어렵다”며 “경영 리스크기 있으면 투자를 회수하면 되는 것이고 기업가 비위나 잘못이 있다면 법으로 제약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현재 수탁위원은 총 9명으로 가입자와 근로자, 사용자 대표 각각 3명씩으로 구성돼 있다. 최근까지 수탁위원으로 재직한 허희영 한국항공대 총장은 “수탁위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는 건 가입자 대표 3명일 수밖에 없다. 근로자나 사용자 대표는 노사 진영에서 파견돼 대표성을 갖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며 “위원들은 다른나라에 비해 전문성이 부족한 면이 있다. 위원들이 대표성에 충실하다보니 전문성보다 진영논리에 갇히게 된다”고 말했다.
연금 사회주의의 부작용을 경계해야 한단 지적이다. 허 총장은 “국민 입장에서 자기가 낸 돈으로 잘못한 기업을 혼내고 대표이사를 쫓아내면 국민의 기업으로 만들 수 있단 착각을 할 수 있다”며 “하지만 그건 사실 기업이 국유화되는 것이고 그리스 등 많은 나라에서 실패했던 연금 사회주의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차기 정부에선 연금 개혁을 국정과제의 최우선순위에 둬야 한단 조언이다. 최 명예교수는 “만약 우리나라에서 기금운용 수익률이 –20% 정도로 크게 손해난다면 정권이 바뀔 것이다. 기금 운용은 가장 경쟁적 시장이다. 우리나라 기금 규모가 올해 1000조를 넘어설텐데 이 정도 규모 기업을 운영하려면 대단한 전문가들만이 할 수 있다”며 “스튜어드십, 대표소송제 도입 등의 논의보단 고액의 돈을 들여서라도 연기금 운용에 관한 최고 전문가를 섭외하는데 힘을 기울여야한다”고 말했다.
허 총장은 “국민연금은 국민들이 노후 자금을 맡겨 놓은 것이지 기업을 혼내고 지배구조 개선하라고 맡긴 돈이 아니”라며 “지칫 연기금이 사회 문제 해결사로 나서려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대표소송제는 소송 남발 우려가 크다. 특히 국민연금은 마음만 먹으면 어떤 기업에게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소송 특성상 피소 당한 기업 임원은 죄가 없더라도 무죄입증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진행 과정에서 타협하게 되고 헷지펀드 쪽에 악용될 수도 있단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