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보 “시장 자율 결정 과정 존중”→“감독 당국 역할할 것”
주택가격 안정화 등 정부 정책과는 충돌···“적극 행동 부담될 것”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사진=연합뉴스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사진=연합뉴스

[시사저널e=이기욱 기자] 은행권의 가계대출 금리 상승, 예대금리차 확대 논란이 장기화되자 시장 개입에 대한 금융당국의 태도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애초에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시중은행의 대출금리 산정과 관련해 ‘시장 자율의 영역’이라는 입장을 유지해왔으나 금융당국 책임론이 지속되자 최근들어 직접 개입에 대한 의지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이미 금융당국은 약 4년전 관치 논란에도 불구하고 직접 개입을 통해 은행의 대출금리를 조정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유사한 방식을 활용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다만 현 정부 정책 방향과의 차이점, 금융사와의 관계 변화 등은 금융당국의 행보에 큰 부담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당국 책임론’ 지속···금융위·금감원, ‘금리 인하 유도’로 입장 선회

9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초까지만해도 은행권 대출금리 상승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보여왔던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이 최근 연일 은행들의 예대금리차 확대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정 원장은 이날 은행연합회에서 상호금융 중앙회장들과 간담회를 마친 후 취재진들과 만나 “은행을 중심으로 예금금리와 대출금리 산정 체계를 검토하고 있다”며 “과도하게 예대금리차가 있는 경우 어떤 요인에 의한 것인지 분석해서 필요하면 관련된 시정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하루 전인 지난 8일에도 이와 관련해 “예대금리차가 과거에 비해 벌어졌다면 왜 벌어졌는지 점검하고 점검 결과가 타당한지에 따라 감독당국의 ‘역할’을 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는 지난달 9일 시중은행장 간담회 후 “금리라는 것은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으로 시장 자율 결정 과정에 대해 존중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금융위원회 역시 마찬가지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16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시장금리 오르고 우대금리가 축소되는 추세”라면서도 “정부가 직접 개입하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달 5일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는 “금감원과 같이 은행 대출금리 산정체계나 예대금리차 추이를 면밀히 모니터링 하고 있다”고 한발짝 물러났다.

이러한 입장 변화는 가파른 대출금리 상승세 속에 커지고 있는 ‘금융당국 책임론’을 불식시키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10월 기준 국내 은행권의 주택담보대출 평균금리는 3.26%로 전월(3.01%)대비 0.25%포인트 상승했다. 지난 8월(2.88%)과 비교하면 0.38%포인트가 올랐다. 금융당국은 지난달 18일 총량규제가 아닌 시장금리 상승이 은행권 대출금리 상승의 주요 원인이라는 내용의 자료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금융소비자들의 불만은 여전히 줄어들고 있지 않다.

◇4년 전 최종구·최흥식 사례와 유사···정책 환경은 달라

금융당국은 비교적 최근인 지난 2017년말과 2018년초에도 은행의 대출금리 산정 체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바 있다. 2017년 12월 신한은행이 주택담보대출의 가산금리를 0.05%포인트 인상하자 최흥식 당시 금감원장은 즉각 “시장금리를 따라서 대출금리를 올린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닌데 수신금리가 올라서 (가산금리를) 올린다는 것은 이상하다”며 제동을 걸었다.

또한 그는 금리 결정 여건과 시스템에 대해 점검할 예정이라고 엄포를 놨고 결국 신한은행은 2018년 1월 가산금리를 원래 수준으로 내렸다. 최 전 원장에 이어 최종구 당시 금융위원장도 “가산금리 산정방식이 투명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함께 은행권을 압박했고 일각에서는 시장 자율성 침해, 관치 논란이 일기도 했다.

실제로 금감원은 2018년 2~3월 ‘대출금리 산정체계 적정성 점검’을 실시해 하나은행, 한국씨티은행, 경남은행 등에 대한 일부 부당 부과 사례도 적발했다. 현재 금감원 역시 각 은행 대출금리 산정 체계가 모범규준에 따라 운영되고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점검 결과가 가산금리 인하의 새로운 압박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

다만 2018년 당시와는 다른 정부 정책 방향, 금융사와의 관계 등은 금융당국 입장에서 다소 부담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금융당국 입장에서는 전국민적 비판 여론을 해소하기 위해 대출금리 인하를 유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한국경제 전체로 보면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져있는 상황이다. 주택가격 안정화, 금융불균형 위험 해소가 정부 정책의 주요 목표인 상황에서 금융당국이 그와 상반되는 대출금리 인하 정책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는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국민들의 비판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고 개입을 원하는 목소리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발언을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취하고는 있지만 돌이켜보면 그동안 금융당국이 원했던 것은 대출 증가세 둔화, 총량 감소였다”며 “가계대출 금리 인하는 이와는 정반대의 행보”라고 분석했다.

이어 그는 “대출금리 인하가 무조건 환영받았던 4년 전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며 “금융위원장, 금감원장 등이 독자적으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018년에 비해 은행들의 경영 자율성이 크게 향상됐다는 점도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금융당국의 결정에 대부분 순응했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 은행을 비롯한 금융사들은 금융당국의 제재, 징계에 행정소송 등의 방법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무엇보다 문제시될 수 있는 것은 사기업의 경영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관치금융에 대한 비판이 과거보다는 더욱 크게 일어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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