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릉 우성 등 최종 관문서 줄줄이 낙방
안전진단 절차 내년 대선 이후로 연기
2018년 평가 기준 강화 이후 5곳 통과
지자체 항의에도 국토부 규제 기조 여전
[시사저널e=길해성 기자] 서울 재건축 초기 단계 단지들이 정부에 발목을 잡힌 모양새다. 재건축 첫 관문인 ‘안전진단’ 추진을 내년 대선 이후로 줄줄이 미루고 있다. 이번 정부가 집값 안정화를 위해 안전진단을 틀어쥐고 있는 이상 통과가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재건축 지연으로 인한 공급 부족 우려가 또다시 집값 자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강동구 명일동 한양아파트는 안전진단 신청을 내년으로 연기했다. 바로 옆 우성아파트 역시 지난 6월 1차 안전진단을 통과했지만 2차 안전진단 신청은 잠정 보류한 상태다. 이 밖에도 노원구 상계동 상계주공 3∙6단지, 송파구 풍납동 풍납미성 등 재건축 초기 단계 단지들이 안전진단 추진을 줄줄이 미루고 있다.
안전진단은 재건축 사업을 하기 위한 첫 관문이다. 재건축 필요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고 재건축 정비기본계획 수립의 전제 조건으로 재건축 가능 여부를 살펴보는 단계다. 통상 ‘예비안전진단(현지조사)→1차 안전진단(정밀안전진단)→2차 안전진단(공공기관 적정성 검토)’ 3단계로 이뤄진다. 안전진단을 모두 통과하면 재건축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재건축 첫 관문인 안전진단 추진에 소극적인 것은 이번 정부 하에서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올해 들어서만 강동구 명일동 ‘고덕주공9단지’, 노원구 공릉동 ‘태릉우성’, 양천구 목동 ‘목동11단지’가 최종 단계에서 탈락했다. 특히 준공 37년차로 노원구에서 가장 낡은 아파트로 꼽히는 ‘태릉우성’이 떨어지자 전망은 더욱 어두워졌다.
안전진단 문턱이 높아진 건 2018년 3월 평가 기준이 강화되면서다. 강화된 기준을 살펴보면 ‘구조안정성’은 기존 20%에서 50%로 평가 비중을 높였고, ‘주거환경’(주차대수, 층간소음)은 40%에서 15%, ‘설비노후도’(놋물, 전기배관)은 30%에서 25%로 낮췄다. 노후화된 주거환경에도 구조안정성 비중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 다수의 단지가 안전진단 단계에서 고배를 마시는 상황이다.
실제로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을 강화한 이후 2차 안전진단까지 통과한 단지는 ▲양천구 목동신시가지6단지 ▲마포구 성산시영아파트 ▲여의도 목화아파트 ▲서초구 방배삼호아파트 ▲도봉구 삼환도봉아파트 등 5곳에 불과하다. 변경 전 3년 동안 서울에서 56개 재건축 단지가 안전진단을 통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안전진단의 최종 결정권이 사실상 국토교통부에 있다는 점도 통과가 어려운 요인으로 꼽힌다. 1차 안전진단은 서울시장이 업체를 선정할 수 있어 속도를 낼 수 있다. 하지만 2차 안전진단은 국토부 산하 공공기관(한국건설기술연구원∙국토안전관리원)이 맡는다. 정부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자체들도 항의에 나섰지만 정부는 규제 기조를 고수하고 있다. 지난달 김수영 양천구청장, 오승록 노원구청장, 박성수 송파구청장은 노형욱 국토부 장관을 만나 재건축 안전진단과 관련한 주민들의 의견을 전달하며 합리적인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피력하기도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 역시 꾸준히 안전진단 완화를 요청했지만, 노 장관은 여전히 집값 안정화를 위해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재건축 단지들이 신중 모드에 돌입한 또 다른 이유는 안전진단에서 한 번 떨어질 경우 추가 투입되는 시간과 비용이 적지 않아서다. 강동구 명일동 재건축 추진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2차 안전진단에서 떨어지면 예비안전진단부터 다시 받아야 하는 등 사실상 재건축 사업에 재동이 걸리게 된다”며 “수억원에 달하는 안전진단 용역 비용을 또 다시 모금해야 한다는 점도 부담스러운 부분이다”고 말했다. 이어 “불확실성이 큰 만큼 차라리 내년 정부가 바뀐 이후 안전진단을 추진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재건축이 늦어질수록 오히려 시장을 자극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재건축 추진 단지들이 안전진단을 미루는 것은 시장에 공급 부족 시그널로 비춰질 수 있다”며 “정부가 공급 활성화를 강조한 만큼 이를 위해선 서울 주요 주택공급 통로인 재건축 절차 지연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