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브, 손보 부문 강화 위해 계획 이어갈 수도
기존 디지털손보사 적자 행진은 '부담'
[시사저널e=유길연 기자] 라이나생명이 처브그룹에 매각되면서 라이나가 추진하던 디지털손해보험사 설립 계획의 향방이 묘연해졌다. 처브가 인수 후 라이나생명 사업에 대한 재검토에 들어가면 디지털손보 설립안도 백지화될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처브가 이번 인수합병(M&A)으로 국내 보험업계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디지털손보사 설립을 이어서 추진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11일 금융권에 따르면 라이나생명의 모회사인 시그나그룹은 한국 등 아시아태평양지역과 터키의 생명과 상해보험 등의 사업을 현금 57억7000만달러(약 6조8649억원)에 처브그룹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라이나생명은 처브의 계열사가 된 후에도 같은 브랜드로 계속해서 영업하게 될 전망이다.
이번 매각으로 라이나생명이 발표한 디지털손보사 설립 계획도 불투명해졌다. 라이나생명은 지난 6월 외국계 회사 최초로 국내 디지털 보험업계에 출사표를 낸 바 있다. 시그나가 직접 1500억원을 투자해 설립하기로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정했다. 시그나는 헬스케어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어 새로운 디지털손보사는 헬스케어 융합형 보험서비스를 제공할 것으로 업계의 기대를 모았다.
라이나생명의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면서 디지털손보 설립 경쟁의 열기도 다소 식는 분위기다. 라이나생명의 계획이 전해지자 국내에서는 디지털손보 업계는 국내 대형 금융사(교보·한화·하나)와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 그리고 외국계 보험사의 ‘삼국지’로 재편된다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라이나생명의 이번 매각으로 디지털 손보사는 기존 금융사와 카카오 2파전으로 압축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처브가 라이나생명을 인수한 후 디지털손보사 설립 계획을 계속 추진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처브그룹이 현재 국내 보험업계에서 차지하는 몫이 아직 작다는 점을 고려하면 추가적인 사업 확장을 꾀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처브가 소유한 국내 보험사는 처브라이프와 에이스손보 두 곳이다. 이번에 '알짜 생보사'로 평가되는 라이나생명을 사들이면서 처브는 그간 깊은 부진에 빠졌던 생보 부문은 경쟁력 강화에 성공했다. 이 여세를 몰아 손보 부문도 디지털보험사 설립으로 사업 확장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에이스손보의 지난해 당기순익은 498억원으로 업계 9위 수준이다. 생보 부문보다는 사정이 낫지만 국내 대형 손보사 대비 실적 차이가 큰 상황이다. 자산 규모로 따지면 상위사와 격차가 더 벌어진다. 이에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디지털 보험 시장에 진출해 수익 증대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디지털보험시장은 포화상태에 달한 국내 보험 시장에서 유일하게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손해보험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9월말 기준 국내 10개 손보사의 CM채널(사이버마케팅 채널) 원수보험료는 3조4178억원으로 전년동기(2조6297억원) 대비 30% 크게 늘었다. 대면영업을 비롯해 전화영업(TM채널) 등은 감소한 반면 CM채널만 유일하게 증가했다. 특히 최근 ‘미니보험(소액단기보험)’ 시장의 성장은 디지털손보사 설립 행렬을 일으키는 요인이 됐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처브가 사업 양수 대가로 시그나에 지불한 액수는 예상보다 크다라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라며 “이는 라이나생명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디지털손보사 설립 등 기존 사업 전반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을 가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다만 디지털손보사들이 예상보다 수익 증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은 부담일 것으로 예상된다. 디지털손보사는 마진이 크지 않은 미니보험을 주로 판매하고 있다. 수익을 늘리기 위해서는 장기보험으로 판매를 확대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장기상품 판매로 이어지지는 않아 실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진단이다.
라이나생명 관계자는 “디지털손보사 설립 계획은 미국 모기업인 시그나에서 추진했기 때문에 라이나생명은 처음부터 사업 권한이 없었다”라며 “추후 디지털손보사 계획의 진행 여부도 인수 주체인 처브그룹의 판단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