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세탁 사건 발생하면 은행도 책임···수수료수익도 크지 않아
성장성 보고 계약 연장···'고객 불만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 관측도
[시사저널e=유길연 기자] 신한·NH농협은행이 고심 끝에 가상화폐 거래소에 실명계좌를 계속 발급하기로 했다. 득보다 실이 많다고 여겨지던 거래소와의 실명계좌 재계약을 두 은행이 결정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일각에서는 가상화폐 시장의 향후 성장 가능성 때문에 계약을 이어갔다는 관측이 나온다. 기존 고객들의 불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재계약을 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은행은 최근 가상화폐 거래소인 코빗에 실명계좌 확인서를 발급했다. 농협은행은 빗썸·코인원과 재계약했다. 두 시중은행은 거래소와 함께 자금세탁 방지 등 금융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시스템을 빈틈 없이 구축하겠다는 방침이다.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개정으로 가상화폐 거래소는 영업을 이어가기 위해선 은행으로부터 실명 계좌 발급 확인서를 받아야 한다.
신한·농협은행은 가상화폐 거래소와 실명계좌 계약 연장 여부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 거래소와의 계약에 따른 이익 대비 짊어져야 할 리스크가 더 크기 때문이다. 신한·농협은행이 올해 상반기 거래소와 제휴를 통해 거둔 수수료이익은 각각 5억원, 62억원에 그친다. 두 은행 모두 상반기 당기순익이 1조원 정도라는 것을 고려하면 작은 규모다.
반면 계좌를 내준 거래소에서 자금세탁 사고가 발생하면 은행은 막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IBK기업은행은 최근 미국 연방 검찰과 뉴욕 금융감독청으로부터 자금세탁방지 위반 등의 혐의로 벌금 1049억원을 부과받았다. 벌금과 함께 문제가 된 해외 지점의 업무가 중단될 가능성도 있다.
특금법 개정으로 은행은 실명계좌 발급에 있어 거래소 검증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 은행 입장에서는 거래소가 실명계좌와 관련된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컸다. 가상화폐는 그간 익명성을 기반으로 거래됐기 때문에 거래소는 리스크 관리 역량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평가다. 시중은행 가운데 KB국민·우리·하나가 거래소와 계약을 맺지 않은 이유다.
해킹 사고 발생 가능성도 부담이다. 실제로 지난 2017년 국민은행과 계좌 발급 계약을 맺은 빗썸에서 해킹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사고로 약 3만1000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국민은행은 보이스피싱이나 자금세탁 등 2차 사고에 대한 우려를 고려해 즉각 제휴 관계를 끊었다.
금융권에서는 신한·농협은행이 가상화폐 시장의 미래 성장 가능성 때문에 거래소와 계약을 연장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가상화폐는 그간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거래되고 있다. 비트코인의 시세는 다시 5만달러 선을 넘었다. 기업의 가상화폐 투자도 늘고 있다.
가상화폐 거래가 늘어나면 제휴 은행들의 수수료수익도 증가하고, 신규 고객도 크게 늘어날 수 있다. 케이뱅크가 이러한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케이뱅크가 올해 상반기 업비트 제휴로 거둔 수수료수익은 170억원이 넘는다. 신규 고객도 크게 증가해 수신액이 단숨에 11조원을 돌파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고객은 보통 주거래 은행에서 잘 옮기지 않기 때문에 은행들은 신규 고객 유치에 애를 먹고 있다”라며 “이런 상황에서 거래소 제휴로 인한 신규 고객 확보는 분명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한·농협은행이 '울며 겨자 먹기'로 재계약을 했을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계약이 중단되면 그간 계좌를 받아 해당 거래소에서 가상화폐 거래를 하던 고객들의 불만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재계약을 했다는 설명이다. ‘대형은행이 거래소를 죽였다’라는 비판도 부담이다.
특히 가상화폐 거래의 주요 고객인 'MZ세대’(20·30대)들의 불만에 대한 우려가 컸을 것이란 관측이다. 최근 디지털화의 가속화로 시중은행은 비대면 거래에 익숙한 MZ세대 고객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좌 발급을 거부해 거래소 영업을 중단시키면 MZ세대가 등을 돌릴 수 있는 점은 부담이었을 것이란 설명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신한은행, 농협은행 모두 내부적으로 거래소 재계약에 대한 반대가 많았을 것이다”라며 “하지만 계약 중단으로 인해 불거질 고객들의 불만 때문에 계약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