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적 논리로 ‘취업제한’ 본래 취지 훼손
취업승인 절차 통해 ‘불공정’ 논란 해소해야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13일 8·15광복절 가석방으로 출소한 이후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을 찾았다. 공식 회의를 주재하지는 않았지만, 집무실에서 경영진과 미팅을 가진 뒤 업무 현안을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의 경영 행보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가법)상 취업제한 규정을 사실상 무력화 한 것이다. 특경가법 제14조는 횡령·배임 등의 범죄로 자신이나 제3자가 5억원 이상의 재산상 이익을 취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에 대해 징역형 집행이 종료되거나 집행을 받지 않기로 확정된 날부터 5년간 취업을 제한하도록 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공범 관계에 있는 박상진 전 사장과 황성수 전 전무가 범행 당시 재직했던 삼성전자가 특경가법 시행령에서 정하고 있는 ‘범죄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업체’에 해당해 취업제한 대상이 된다. 법무부는 이 같은 사유로 지난 2월 이 부회장에게 취업제한을 통보했다.
이 부회장은 형식적 논리를 내세워 취업제한 위반은 아니라고 해명한다. 법률상 취업은 임원이나 직원이 돼 회사로부터 급여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직위가 없고 급여도 받지 않아서 취업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일종의 ‘자원봉사’ 개념이다. 지위나 권리, 의무가 없는 상태에서 사실상 행위만을 하고 있기 때문에 취업제한을 어긴 게 아니라는 논리다.
법무부도 법률의 명확성 원칙을 이유로 이를 용인하고 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지난 18일 “무보수, 미등기임원, 비상근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취업 여부 판단에 가장 중요한 요소다”며 “이 부회장은 현재 무보수, 미등기임원, 비상근직이다. 일상적 경영 참여를 하는 것은 취업제한의 범위 내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률이 취업제한을 규정한 본래의 취지를 살펴보면, 이 부회장의 경영 행보는 잘못됐다. 취업제한은 업무상 횡령·배임으로 회사에 피해를 준 사람이 다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규정이다. 형식적인 논리를 내세워 경영활동에 다시 참여하거나 실질적 영향력을 끼친다면 법률 취지 자체가 무색해진다. 이 부회장과 법무부는 다수의 경제사범이 유사한 방법으로 계속해 회사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편법’을 공개적으로 공표한 셈이다.
경제개혁연대는 ‘무보수·미등기·비상근’이 취업제한이 아니라면, 실제로 취업제한의 규범력이 미치는 재벌총수, 지배주주인 경제범죄자는 십중팔구 ‘무보수·미등기·비상근’을 선택할 것이다고 지적했다. 재벌총수 입장에서 상근 및 등기 여부는 지극히 부차적인 문제로 오히려 문제 상황에서 책임을 회피하기 쉬운 비상근이나 미등기를 선호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단체는 “재벌총수들은 급여 형태의 보수를 포기하는 대신에, 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는 것이 잠재적으로 훨씬 더 큰 경제적 이익으로 판단할 가능성도 크다”며 “중대한 경제범죄를 저지른 재벌총수들이 손쉽게 경영에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겠다는 것과 같다”고 꼬집었다.
이 부회장을 포함한 재벌 총수들에게만 예외가 적용된다는 생각은 억측일까. 예외가 반복되면 특혜로 비치고, 공정은 훼손된다. 이 부회장은 하루빨리 법무부에 취업승인을 요청하고, 법무부는 절차를 통해 승인 여부를 검토해야 한다. 또 법률상 허점이 있다면 보완도 필요하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속임은 그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