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거버넌스' 상충 지적···"이사회 투명성 문제", "등기이사 복귀해 책임감 보여야"
[시사저널e=이호길 인턴기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재계의 핵심 화두로 부상했다. 경영 투명성이 요구되는 가운데 주요 기업들도 이를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상 지배력 정점에 있는 오너 중 상당수가 등기이사에서 빠져 있어 책임경영을 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재계에 따르면 김범석 쿠팡 Inc 대표는 지난 17일 발생한 경기 이천 덕평물류센터 화재 사고로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직접적 책임론에선 자유로운 상황이다. 지난달 31일자로 이사회 의장과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고, 미국 법인인 쿠팡 Inc 대표직만을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쿠팡 측은 김 대표의 사퇴 배경에 대해 글로벌 경영에 집중하려는 목적이며 화재 17일 전에 사임했다고 설명했다.
등기이사 직책은 기업 경영에 임하는 책임감의 척도로 평가된다. 법률상 등기이사는 법인의 사무를 집행하는 이사 중에 등기된 이사를 뜻하는데, 경영 활동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기업 총수가 경영권을 놓지 않으면서 등기이사직에서 사퇴하면, 권한만 행사하고 책임은 다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를 맡고 있는 하승수 변호사는 “오너가 기업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지만, 등기이사에서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며 “그렇게 되면 기업의 민형사적 문제를 따져야 할 때, 책임을 묻기 힘들다”고 문제 삼았다. 이어 “그럴 경우에는 미등기이사가 경영에 관여했다는 입증을 별도로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기업이 ESG를 강조하는 일련의 흐름과도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하 대표는 “사실상의 기업 오너가 ESG를 강조하면서도 등기이사에서 빠지면 더 비판받아야 한다”며 “기업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경우에는 등기이사로 등재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기업 오너가 미등기임원인 사례는 많다. 이날 기업분석 전문기업 한국CXO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60개 기업집단 총수 가운데 35%에 해당하는 21명은 미등기임원이다. 기업평가사이트 CEO 스코어 기준 대기업집단 순위 1위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7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12위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14위 이재현 CJ그룹 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한화는 지난달 그룹 차원에서 ESG 위원회를 만들었고, CJ그룹도 이사회 산하에 ESG 조직을 설치했다. 신세계그룹 역시 지난 4월 ESG 경영을 확대하기 위해 전담조직을 신설했다.
참여연대 정책위원인 김남근 법무법인 위민 변호사는 기업 이사회의 견제와 감시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등기이사도 아닌 사람이 경영을 한다는 점을 볼 때, 이사회 투명성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상장회사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건 놀랍다”며 “거버넌스를 강조하면서도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제도 개선과 총수의 등기이사 복귀가 거론된다. 김 변호사는 “상법에는 이사로 등재돼 있지 않아도 실질적인 경영 지시를 할 경우 ‘사실상 이사(업무집행 지시자)’로 보고 경영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가 있다”며 “다른 법에도 이사와 동일하게 책임을 묻도록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 대표는 “주주로서 지분만 가지고 있고 회사 경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에는 등기이사로 다시 등재해서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