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인 “CVC, 총수 간접출자기업에 투자·주식 매각 가능”
벤처 투자?···업계 “규제 많아 제약”·시민단체 “CVC 실익 없어”
[시사저널e=이준영 기자] 올해 말부터 일반지주사의 기업형벤처캐피털(CVC) 보유가 허용된다. 이를 놓고 총수일가가 간접출자한 회사를 통해 사익편취가 가능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또 정부가 기대하는 대기업의 벤처 투자 활성화도 의문스럽다는 반응이다. 업계는 제약이 많다고 주장했고, 시민단체는 실익이 없다는 입장이다.
15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일반지주사의 CVC 보유를 허용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은 오는 12월 30일 시행된다. 이에 발맞춰 공정위는 개정 공정거래법에 필요한 사항을 담은 시행령 개정안을 지난 3일 입법예고했다.
그러나 연말 시행되는 공정거래법과 시행령 개정안에는 총수일가의 CVC를 통한 사익편취 방지 장치가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경실련 정책위원장)는 “연말 시행되는 공정거래법은 총수일가가 직접지분은 없지만 간접 출자한 회사에 CVC가 투자를 금지하는 것을 명확하게 명시하지 않았다”며 “마찬가지로 CVC가 투자한 벤처회사를 팔 때도 총수일가가 간접 출자한 회사에 팔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개정 공정거래법은 사익편취를 막기 위해 CVC가 총수일가 및 총수일가가 출자한 기업에 투자하거나 보유 주식 매각을 금지했다. 그러나 총수일가가 간접 출자한 기업에 대해 CVC가 투자 및 보유 주식 매각을 금지한다는 내용은 명시되지 않았다. 총수일가가 지배하는 회사의 자회사의 경우 CVC가 투자하거나 보유한 벤처 주식을 매각할 수 있다. 다만 총수일가가 간접 출자한 회사여도 CVC와 같은 기업집단에 속해 있거나 공시 대상인 경우는 CVC의 투자가 불가능하다.
박 교수는 “일반지주사 CVC 허용은 총수일가의 사익편취 수단이 될 수 있다. 또한 부당 승계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앞으로 재벌 세습은 벤처기업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며 “정부는 이러한 법의 미비점을 시행령 개정을 통해 보완해야 했다. 그러나 최근 입법예고한 시행령 개정안도 총수일가가 간접 출자한 회사에 CVC의 투자나 보유 주식 매각 방지 내용을 담지 않았다. 경실련은 입법예고 기간 내에 이러한 미비점 개선 의견을 낼 것”이라고 했다.
이에 공정위 관계자는 “총수일가가 간접 출자한 회사라도 기업집단에 속하거나 공시 대상이면 CVC가 투자하거나 보유 주식을 매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외의 기업은 가능하다”며 “간접 출자 회사를 통한 총수일가의 사익편취 의혹이 발생한다면 사례에 따라 사익편취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 대기업 지주사 현금 41조···벤처 투자 활성화될까
정부는 일반지주사에 CVC 보유를 허용함으로써 대기업 자금이 벤처 투자에 쓰일 것을 기대하고 있다.
공정위가 지난 10일 발표한 ‘2020년 12월 말 기준 지주회사 현황’에 따르면 140개 일반지주회사가 보유한 현금 및 현금성자산은 55조3490억원에 달했다. 특히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24개 대기업집단(금융지주회사 제외)은 41조4000억원을 보유하고 있다. 한 지주회사 당 평균 1조7250억원의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가진 꼴이다.
정부는 대기업집단 지주회사들에게 벤처 투자를 촉구하기도 했다. 지난 4일 공정위는 ‘벤처투자 활성화를 위한 지주회사 제도개선 관련 업계 간담회’를 열고 CVC‧벤처지주회사 관련 제도개선이 벤처투자 활성화라는 본연의 목적에 기여할 수 있도록 업계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부탁했다. 당시 간담회에는 SK, LG, GS, LS, 효성, 동원엔터프라이즈, 대웅, 네오위즈홀딩스 소속 임원 8명이 참석했다.
다만 아직 대기업집단 일반지주사 가운데 CVC 설립을 결정한 곳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CVC 설립을 확정했다고 정부에 알린 곳은 없다. 검토 중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와 시민단체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벤처 투자 활성화에 의문을 제기한다.
박상인 교수는 “기존에도 대기업들은 지주회사 체제 안팎에서 알아서 벤처 투자를 해왔다. CVC의 역할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팀장은 “개정법은 CVC의 차입을 200%까지 허용하고 CVC가 조성한 펀드에 40%까지 외부자금 출자를 허용하도록 했다. 이는 대기업 내부의 풍부한 여유자금을 벤처투자에 쓰이도록 하겠다는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외부 차입과 펀드 조성 시 외부 출자를 허용했다는 점에서 지주사의 내부 자금 활용이 최소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업계는 차입 및 외부 출자 제한 비율이 대기업의 벤처 투자를 제약한다고 밝혔다.
유정주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제도팀장은 “정부는 CVC에 대해 자기자본 200%내 차입, 펀드 조성 시 외부 출자 40%까지만 허용하고 일반지주사가 완전자회사로만 CVC를 설립하도록 했다. 이는 대기업의 벤처 투자 활성화를 제약한다”며 “세계적으로 CVC에 이런 규제를 둔 나라는 없다. 자회사든 손자회사든 설립이 가능하도록 했고 외부 출자 비율 제한도 없다”고 말했다.
전경련에 따르면 베르텔스만 아시아 인베스트먼트는 독일 베르텔스만 그룹이 아시아 지역의 벤처투자를 위해 설립한 CVC다. 이 회사는 지주회사의 손자회사 형태다. 중국 레전드홀딩스의 CVC인 레전드캐피탈은 2019년 말 기준 76억달러 규모의 펀드를 운용하고 있는데, 레전드홀딩스와 그 자회사들이 펀드자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6.6% 수준이다.
유 팀장은 “시행령 개정안 입법예고 기간 공정위에 CVC 외부자금 출자 비율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도록 하는 방안을 건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벤처 업계도 CVC 관련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박태근 벤처기업협회 팀장은 “외부차입이나 외부 출자 규제를 완화해야 벤처 투자가 활성화 될 수 있다”며 “CVC를 통해 벤처 기업도 자금 회수 통로가 생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