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엔드 제품일수록 고가 IP 필요
정부, R&D 세제지원 범위 확대 전망
[시사저널e=윤시지 기자] 국내 팹리스 업계의 매출 대비 연구개발(R&D) 비용 비중이 20%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도체 설계 업종 특성상 높은 초기 개발비용과 인건비 등 고정비로 인해 외형 성장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13일 국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세제지원과 인프라 구축 방안을 꺼내들었다. 중소·중견업계를 중심으로 수년간 불거진 전문 인력난 해소를 목표로 인력 양성 전략도 마련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팹리스 상위 18개사의 매출 대비 연구개발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의 평균은 약 17.7%로 집계됐다. 이들 업계 매출 대비 R&D 비중은 2018년 18.7%, 2019년 18.8%로, 대체로 20%에 육박하는 연구개발비를 집행해왔다. 지난해 삼성전자 매출 대비 R&D 비중이 9%를 기록한 점을 감안하면 높은 편이다. 특히 지난해 이들 18개사 가운데 9개사가 연간 적자를 기록했지만, 전체 연구개발비 비중은 줄이지 못했다.
R&D 비중 42.3%를 기록한 칩스앤미디어는 지난해 매출(154억원)이 전년 대비 4.6% 줄었지만, 연구개발비(65억원)는 전년 대비 1% 늘렸다. 칩스앤미디어 관계자는 “연구개발비 대부분은 인건비가 차지한다”면서 “현재 전사 인력의 80%가 R&D 전문 인력”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팹리스 업계는 연 매출 1000억원이 넘는 기업이 5~6개사에 그칠 정도로 규모가 영세한 업체들이 많다. 전방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출 규모가 영세한 업체일수록 고정비 부담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하이엔드 반도체일수록 설계 단계부터 고가 설계자산(IP)이 요구되기 때문에 초기 개발 비용 규모가 만만치 않다. 업체별로 활용하는 IP에 따라 14나노 칩 초기개발비용(NRE)의 경우 80억원대, 시제품 제작비의 경우 100억원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대만과 중국 등에선 정부 차원에서 팹리스 업계의 개발비(NRE) 상당을 지원해주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팹리스 업계 R&D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구조라, 국내 업계도 관련된 요구가 나왔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정부는 팹리스 육성 전략을 내놨다. 정부는 2030년까지 510조원 이상의 민간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K-반도체 전략’를 발표했다. 메모리 반도체부터 파운드리, 팹리스, 패키징까지 국내 반도체 산업 전반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공급망 구축, 기업 세제 및 금융지원, 인력양성 등 방안이 담겼다. 미국과 중국 등 각국 정부들의 반도체 기술 주도권 경쟁이 한창인 가운데 국내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정부는 국내 대기업·중견·중소 팹리스의 R&D 세제지원을 강화한다. 현재 지원되는 일반투자와 신성장·원천기술 부문으로 구성된 세제 지원 외에 더 높은 세액 공제율을 적용하는 3단계 ‘핵심전략기술’(가칭) 부문을 신설한다. 정부는 핵심전략기술 R&D 세제지원을 통해 대기업·중견기업에게 30~40%, 중소기업에게 40~50%의 세액공제를 지원할 전망이다. 기존 신성장·원천기술 세제지원(대기업·중견기업 20~30%, 중소기업 30~40%) 보다 세액 공제율이 더 높다. 핵심전략기술 관련 시설투자의 경우 대기업 6%, 중견기업 8%, 중소기업 16%의 공제율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정부는 핵심 반도체 기술을 확보하고 시설 투자를 촉진한다는 전략이다. 현재 산업부는 관련 부처와 핵심전략기술 부문 신설을 두고 지원 기술과 범위 등을 협의 중이며, 올 하반기부터 해당 부문 신설에 따른 세제지원 적용을 목표한다. 올 하반기부터 2024년까지 집행되는 투자분을 적용한다. 특히 신설되는 세제지원 기술 대상은 현시점에서 국내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술을 포함할 전망이다. 중소·중견업체에게 기회가 될지 주목된다.
중소 팹리스 업계 관계자는 “예전부터 세제지원 범위를 확대하거나 공제율을 높일 것이란 전망은 많이 나왔다. 정책 실효성이 관건이 될 것”이라면서 “현재 20%대 수준의 R&D 세제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 지원이 확대될 경우 연구개발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판교를 중심으로 ‘한국형 팹리스 밸리’를 조성한다. 판교 시스템반도체 설계지원센터 기능을 강화하고 내년부터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 지원을 확대한다. 중소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8인치 파운드리 실습 인프라 등 공정장비 실습센터도 구축한다.
금융지원도 추가할 전망이다. 8인치 파운드리 증설과 소재, 부품, 장비 및 첨단 패키징 시설투자를 위해 1조원 이상 규모의 반도체 등 설비투자 특별자금을 신설한다. 다양한 금융프로그램도 지원한다.
중소·중견 반도체 업계의 고질적인 인력난도 해결될지 관심이 모인다. 그간 메모리 일변도인 국내 반도체 산업 특성상, 전문인력의 대기업 쏠림 현상이 두드러졌다. 전문인력 양성 시스템도 부족했다. 반도체산업인력실태조사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반도체 산업 인력 부족은 약 1500명 수준으로 추정된다.
이에 정부는 관련 대학 정원을 확대하고 실무 교육 지원을 통해, 2022~2031년 간 반도체 산업 이력 3만6000명을 육성한다는 전략이다. 팹리스 업계 관계자는 “어렵게 전문 인력을 뽑더라도 대기업으로 이직하려는 수요가 많았다”면서 “중장기적으로 반도체 설계 전문 인력이 양성될 수 있다면 업계 전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