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사드사태 피해 컸던 기업들 재발할까 전전긍긍···대부분 뾰족한 대책도 없어
현지화·중간재 기업 상대적 여유···"중립 외교 한계, 극단적 양자택일은 없을 것"
[시사저널e=최성근 기자] 미국이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예상과 달리 중국과의 대립각을 더욱 세우면서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정부는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지만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형편이다.
3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오는 21일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첫 정상회담을 갖는다. 양국 정상은 이번 회담에서 동맹 관계를 다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특히 미중 무역 갈등과 한국의 쿼드(중국 견제를 목적으로 결성된 미국·일본·호주·인도의 4개국 협의체) 참여 등 민감한 현안이 논의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복수의 외교 보고서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미국 내부 조야에서는 중국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통상 분야에서도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이후 중국과 무역 전쟁을 불사하며 공세적인 기조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는 미국이 중국과 1대 1로 맞붙였다면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는 동맹들을 끌어들여 대중국 견제에 나서는 상황이다.
이는 우리 나라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과거에는 유럽 등 다른 동맹도 사안에 따라 미국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등 미중간 중립적 자세를 취할 여지가 있었지만 바이든 정부 하에서는 중간지대가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통상 전문가는 “미중간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정부 정책은 한계점에 왔다”고 현 상황을 진단하고 있다.
경제 분야도 마찬가지다. 미중간 무역 분쟁 심화 등 통상환경 악화로 인한 불똥이 우리 기업에 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도체 분야가 대표적이다. 미국은 최근 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밝히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미국 공장 설립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이에 맞서 시안에 반도체 공장을 갖고 있는 삼성에 파격적인 혜택을 제시하며 증축을 재촉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주요 국가에 진출한 국내기업 301곳을 대상으로 현재 기업들이 가장 심각한 부담을 느끼는 통상 이슈를 묻자 절반 가까운 기업(41%)이 미중 갈등을 꼽았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대기업이나 중소기업 할 것 없이 기업들은 여러 통상문제 중 미중간 문제에 가장 신경쓰고 있는 상황”이라며 “미국의 대중국 강경기조가 확대되는 데 대해 특히 중국 진출 기업들이 많은 우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는 21일 열리는 한미정상회담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의 요구를 상당 부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면서 기업들의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과 마찰을 빚는 중국의 반발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다.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은 과거 사드 사태 때 큰 피해를 입은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다. 롯데마트 등이 사업 철수까지 했던 상황을 지켜본 이들은 숨을 죽인 채 이번 미중갈등으로 인해 또 다시 자신들이 엉뚱한 피해를 입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사드 사태 당시 매출이 급락했던 10대 그룹 관계자는 “미중 간 갈등이 생기면 무조건 안 좋은데 무엇이 어떻게 걱정된다는 말을 하기도 부담스럽다”며 “지난번 사드 사태 때 얼토당토않은 걸로 국내 기업들이 타격을 받아 괜한 트집 잡히지 않도록 말을 아끼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우려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기업도 있다. 소재, 부품 분야 대기업 관계자는 "중국 매출 비중이 높지만 중국에서 만든 것은 중국에서 소비를 하기 때문에 미중 갈등에서 수출 관련해서 이슈가 되는 부분은 없다"며 "우리는 주력이 소비재가 아닌 중간재이다 보니 과거 한국 기업을 타깃으로 한 불매운동으로 인한 타격은 롯데마트나 이마트에 비해 덜 한 편"이라고 말했다.
중국 내 높은 점유율이나 현지화 전략이 미중갈등의 여파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비결이라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우리가 만든 제품 공급 비중이 중국에서 워낙 높은 수준이라 우리 것을 막으면 중국도 곤란한 부분이 있다"며 "현지에선는 철저하게 현지화를 하고 있어 업종 특성상 브랜드가 잘 드러나지 않아 삼성이나 LG처럼 대놓고 한국 기업 느낌이 없다"고 말했다.
정부도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직접적인 대책은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미중 갈등 관련해서 작년이나 재작년 화웨이 제재 등 이슈가 있었는데 이런 상황들을 계속 모니터링 하면서 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와 공유하고 있다”며 “기업들과 간담회도 부정기적으로 열면서 의견을 수렴하면서 상황들을 공유하고 향후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이어 “바이든 정부가 출범한지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고 정책도 발표하고 있는데 (정책이) 조금씩 달라지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송영관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가면서 우리 기업이 제2의 사드사태 같은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며 “다만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때와는 다르게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고 언급, 미중이 우리 정부에 극단적 양자택일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중 갈등에서 우리처럼 고민하는 나라들이 대부분이라 미국과 중국도 우리가 어느 한 쪽을 택하는 건 무리라는 걸 이해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송 위원은 우리 기업의 대응 방향으로 "기업들이 공급 사슬을 나눠서 공급하는 식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주요 기술을 미국이 갖고 있고 미국 기술이 들어간 제품을 중국에 수출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공급 사슬을 두 개로 나눠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서 정치나 외교 이슈에 끼어서 단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었다"며 "이번 사안에서도 우리는 가급적 멀리 떨어져 있고 싶고 가급적 거론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게 대책이라면 대책"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