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MM 12번째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HMM 상트페테르부르크호’···건조 막바지
해운업 ‘규모의 경제’ 실현할 2.4만TEU 선박···실익률 크게 개선 7호까지 ‘만선’
“선체 내부가 복잡하고 넓어요. 자칫 길을 잃을 수 있으니 잘 따라 오세요.”
HMM 상트페테르부르크호가 건조 중인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를 11일 찾았다. 이날 안내를 맡은 이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날도 궂었다. 조선소 내부 규정 상 우산을 쓸 수 없어 우비를 걸쳐야 했다. 안전모와 안전화, 고글 등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빗물을 뚫고 선체에 다가섰다. 이윽고 선체 내부로 이어진 연결다리를 통해 선체 내부에 들어섰다.
한 달 넘게 이어진 장마와 바닷가 특유의 고습도가 선체를 감쌌다. 전날 지나친 태풍의 여파로 바람이 불어 평소보다 시원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발걸음을 뗄 때마다 굵은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선체 바닥에서부터 기관실 엔진룸 꼭대기까지 오르내리고, 갑판을 지나 선실·조타실 등이 위치한 거주구로 들어서 재차 정상까지 올랐다.
오가는 길은 험난했다. 컨테이너 적재라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선박이라, 개개인의 편의성은 우선시되지 않았다. 특히 기관실의 경우 ‘사다리 보다 완만하지만 계단치고는 굉장히 가파른’ 길고 짧은 층계들이 이어져 더욱 오르고 내리기 힘들었다. 선박의 운항과 컨테이너 적재를 제외한 공간들을 최소화 시켰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다.
갑판도 마찬가지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아 일부 장비들이 들어선 탓에 더욱 좁아보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설 공간조차 없었다. 높이 쌓이는 컨테이너들을 지지할 장비들이 고정된 탓에 발 아래로 갖은 장애물이 많았다. 앞만 보고 걷는다면 걸려 넘어지고, 발아래만 주시하면 기둥 등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곳과 비교하면 거주구는 그나마 사람을 위한 공간이었다. 추후 엘리베이터가 설치될 예정인 까닭에 층층이 걸어올라야 했다. 건물들은 각 층에 숫자를 붙이지만, 선박에서는 알파벳을 붙인다. 첫 번째 층은 ‘A데크’, 한 층 위는 ‘B데크’라 칭한다. 이 선박은 H테크까지 있었다. 각 데크에는 선원들이 생활하는 공간들이 차례로 위치했다.
직책이 낮을수록 저층부 데크에 배치된다. 자연히 H데크에 이를수록 방의 규모가 넓어지는 구조였다. 각 선실에는 침대·책상·책장·샤워실 등이 고정됐다. H데크에 있던 선장실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 외에도 업무와 회의 등을 주재할 수 있는 집무실도 있었다. H데크 한 층 위는 실질적인 운항과 조타가 이뤄지는 ‘N(네비게이션)데크’가 자리했다.
갑판에서만 지상 10층 높이인 이곳은 선박의 최정상이다. ‘HMM 상트페테르부르크호(HMM St Petersburg)’ 정상에 오른 순간이었다. 위용은 대단했다. 세계 최대 규모 컨테이너선이란 수식어를 그때서야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선체 바닥에서 76m, 건물 15층 높이였다. 커보였던 주변 다른 선박들이 초라해 보이게 느껴졌을 정도였다. 선박의 길이만 400m며, 폭은 61m다. 갑판의 넓이는 축구장 4배 이상 규모다.
HMM 상트페테르부르크호는 HMM이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등에 발주한 12척의 초대형컨테이너선 중 마지막으로 진수될 선박이다. 현재까지 11척의 선박이 건조됐으며 9호선까지 운항을 시작됐다. 코로나19 여파 속에서도 7번째 선박까지 ‘만선’을 기록했다.
8·9호 역시 만선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알려진다. HMM이 발주한 이들 12척의 세계 최대 규모 신형 컨테이너선들은 2만4000TEU 급이다. 20피트 컨테이너 박스 2만4000개를 한 번에 운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정부의 해운재건 5개년 계획에 따라 발주된 12척의 선박은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에 각각 5척, 7척씩 배분됐다.
왜 12척일까.
업체 측은 2만4000TEU급이 투입되는 노선을 도는 데 총 12주가 소요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컨테이너선의 경우 주단위로 적재와 출항이 반복되는데 12척의 선박이 투입돼야 차질 없이 화물들을 실어 날을 수 있다. 기자가 방문했던 12번째 선박이 출정한 이듬 주에는 첫 번째로 투입된 선박이 국내로 돌아와 물건을 싣고 재차 항해에 나서는 방식이다.
굳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컨테이너선을 제작해야 했을까.
HMM 관계자는 “해운업계의 흐름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규모의 경제로 바뀌고 있다”고 답했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터지기 직전까지 속도경쟁을 펼쳐오던 글로벌 해운업계가 치킨게임을 통해 몇몇 업체들로 재편된 이후 효율성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조금 늦어도, 한 번에 많은 물량을 실어 나르는 방식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2015년 이후 글로벌 주요 해운사들이 1만8000TEU급 선단을 갖춘 배경도 이 때문이다. 글로벌 정상급 해운사들의 선복량이 100만TEU다. HMM은 이를 상회하는 수준을 확보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경쟁력 제고 방안을 마련했다.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에 의뢰한 12척 외에도 현대중공업에서 1만6000TEU급 8척을 제작 중이다. 내년부터 HMM에 인도될 예정이다.
회사 관계자는 “선박은 거대하지만 정작 탑승하는 인원 수는 많지 않다”면서 “법적으로 28명 이하의 승무원들이 탑승할 수 있으며 이는 컨테이너 규모와 관계 없다”고 설명했다. HMM 상트페테르부르크호에도 23명의 승조원이 오를 예정이다. 또한 새로 제작되는 선박일수록 연료효율이 개선된다. 경쟁사들이 보유한 1만8000TEU 선박들과 인건비·유지비 등이 동일한 상황에서 더욱 많은 선박 적재가 가능해 선박 규모가 커질수록 이익이 개선되는 구조다.
환경규제에 적극 대응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올 1월 1일부터 국제해사기구(IMO)의 환경규제책 ‘IMO 2020’이 본격 시행됐다. 산성비 유발물질인 ‘황산화물(SOx)’ 배출을 줄이기 위해 제정됐는데, 선박연료유의 황 함유량 상한선을 종전 최대 3.5%에서 0.5%로 대폭 낮춰 강화하는 것이 골자다. 이를 준수하기 위해 HMM 상트페테르부르크호에는 스크러버가 설치됐다.
스크러버는 황산화물 저감장치다. 높은 압력의 물을 쏴 이를 침전시켜 배출되는 가스 등의 유해물질 농도를 현격히 줄어들게 하는 역할을 한다. IMO는 오는 205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8년 대비 50% 이상 감축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IMO2020을 시작으로 점차 규제가 순차적으로 강화될 계획이다. 추후 이를 대비하기 위해 HMM 상트페테르부르크호에는 LNG연료탱커 탑재가 가능하게 설계됐다. LNG추진선으로의 전환이 반영된 설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