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프랑스 과징금 등 제재, 미국은 집단 소송 화해···“불공정 관행 적발”
서울고검 “수사미진으로 불기소처분”···소비자들 “부실수사 다시는 없어야”

지난 2018년 1월 18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소비자주권시민회의 관계자들이 애플 CEO 팀쿸 외 1명을 재물손괴죄, 사기죄 등으로 고발장을 제출하기 전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지난 2018년 1월 18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소비자주권시민회의 관계자들이 애플 CEO 팀쿡 외 1명을 재물손괴죄, 사기죄 등으로 고발장을 제출하기 전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애플이 구형 아이폰6~7 시리즈의 배터리 성능을 고의로 저하시켜 신형 단말기 구매를 유도했다는 의혹을 검찰이 재수사한다. 불기소처분 이후 6개월 만에 서울고검이 재기수사 명령을 내린 배경에는 유럽 등지에서 애플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연달아 나온 것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서울고검은 시민단체 소비자주권시민회의가 팀 쿡 애플 대표이사와 다니엘 디스코 애플 코리아 대표이사를 재물손괴죄, 업무방해, 사기 등 혐의로 고발한 사건에 대해 지난 15일 ‘수사미진’을 이유로 재기수사 명령을 내렸다고 19일 밝혔다. 검찰은 다만 구체적인 재기수사명령 사유에 대해서는 공개하지 않았다.

◇ 소비자 “iOS 업데이트 후 기능 저하”···1차 수사한 중앙지검 “고의성·성능저하 인정 안 돼”

애플은 아이폰 운영체제(iOS) 업데이트 과정에서 아이폰6 등 구형 모델의 배터리 성능이 고의로 저하되도록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의혹은 지난 2017년 미국에서 제기된 뒤 ‘배터리 게이트’로 비화하며 세계 각국 아이폰 사용자들의 대규모 집단소송으로 이어졌다.

200만여명의 사용자가 있는 국내에서도 피해 주장이 잇따랐다. 손해배상 소송 의사를 밝힌 피해자가 20만명에 달했다. 애플을 상대로 직접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인 소비자도 6만5000여명으로 집계됐다.

소비자주권시민회의는 iOS 업데이트 이후 배터리 잔량에 따라 최대 30%가량의 성능이 제한되고 휴대폰이 꺼지는 현상, 먹통(전원은 들어와 있으나 작동을 멈춘 상태), GPS 중지, 송수신 불량, 애플리케이션 실행 중 정지 등을 고발의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수사했던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는 피고발인들의 범죄 고의성과 성능 저하 여부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지난 1월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고발 2년 만에 나온 결론이었다.

검찰은 iOS 배포행위가 손괴죄, 업무방해죄, 사기죄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피의자들의 고의가 필요하다는 전제에서 피의자들이 기기의 성능저하 사실에 대해 인식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봤다.

성능 저하 여부에 대해서도 구형 아이폰이 확보되지 않은 점, 애플 측이 업데이트된 휴대폰을 다운그레이드하는 것에 대해 거부한 점, 피해자 3명으로부터 진술을 들었지만, 객관적인 기능 저하가 입증됐다고 보기 어려운 점 등을 불기소 이유로 들었다.

◇ 이탈리아·프랑스 잇따라 제재···미국은 집단 소송 화해

소비자주권시민회의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항고하고 해외사례를 중심으로 추가 증거자료를 제출했다. 이탈리아 공정거래위원회(AGCM), 프랑스 경쟁소비부정행위방지국(DGCCRF),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지방법원의 집단 소송 결과 등 동일 사건에 대한 다른 나라 감독기구나 법원의 결정 관련 자료들을 제출하며 항고 이유를 보충했다.

해외 사례 자료들과 이에 대한 번역문 등을 검찰에 직접 제출했다는 게 소비자주권시민회의의 설명이다. 검찰이 해외 제재 사례를 이유로 재수사를 결정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AGCM 지난 2018년 10월 애플에 1000만유로(약 129억원)의 과징금 처분을 내렸다. AGCM는 성명에서 “애플의 불공정한 상업적 관행을 적발했다”며 “스마트폰에 적절하게 지원되지 않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하도록 소비자를 유도했다. 이 과정에서 충분한 정보를 주거나, 기기의 완전한 성능을 회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성명에는 애플이 소비자들에게 iOS 10 운영체제를 설치해야 한다고 했지만, 새로운 운영 체제의 증가된 에너지 요구와 갑작스러운 종료와 같은 결점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돼 있다. 이어진 업데이트에 따른 장치의 응답속도, 기능저하에 대한 경고도 없었다고 AGCM는 밝혔다.

소비자주권시민회의 관계자는 “애플은 사실상 기기의 느려짐 또는 작동 저하 가능성에 대한 안내 없이 업데이트 설치를 소비자에게 제안했다”며 “이는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프랑스 경쟁소비부정행위방지국(DGCCRF)의 제재 결정은 지난 2월에 나왔다. 2500만유로(325억원)의 벌금과 한 달간 이 같은 사실을 프랑스 애플 홈페이지에 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DGCCRF는 “애플이 아이폰 소비자와 사용자에게 OS 업데이트를 통해 성능이 저하될 수 있다는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다”며 “소비자법에서 금지하는 불공정한 영업 행위를 했다”고 지적했다. DGCCRF 다만 계획적 기기 노후화가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다.

미국 캘리포니아 법원은 지난 3월 애플이 신형 아이폰 모델을 출시하면서 구형 아이폰 속도를 의도적으로 느리게 했다는 의혹과 관련된 소비자들의 소송에서 최대 5억달러(약 5950억원)에 합의하도록 했다. 이는 1인당 25달러에 해당한다. 다만 애플은 과실을 인정하기보다는 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합의금이라는 입장이다. 애플은 배터리 게이트가 터진 직후에도 갑작스러운 전원 꺼짐 현상을 막기 위해 성능을 저하시킨 것이라는 해명을 내놓기도 했다.

지난 2018년 1월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사무실에서 애플 아이폰 1차 집단 손해배상 소송제기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 사진=한다원 기자
지난 2018년 1월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사무실에서 애플 아이폰 1차 집단 손해배상 소송제기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 사진=한다원 기자

◇ “자국 소비자 권리·권익 보호 못 해···부실수사 다시는 없어야”

소비자주권시민회의는 똑같은 원인과 사안으로 발생한 법적 분쟁에 대해 해외와 국내의 결과가 다르다고 지적했다. 수사미진을 이유로 재수사가 이뤄지는 만큼 철저한 수사도 촉구했다.

소비자주권시민회의 관계자는 “검찰은 2년 여간 사건을 케비넷 속에 넣어 두었다가 혐의 없음이라는 무책임한 처분을 했다”며 “서울고검의 재기수사 지휘는 1차 수사를 했던 강남경찰서와 중앙지검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해외는 우리나라 소비자들과 똑같은 기종, 똑같은 문제에 대해 과징금과 벌금 결정을 내리며 자국 소비자들을 철저하게 보호했다”며 “우리나라 관련 기관들은 이런 사례들을 배척한 채 소비자들의 권리와 권익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는지 의문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 수사는 1차 수사의 부실함으로 인해 재수사를 하는 만큼 경찰에 수사지휘를 내려 보내지 않고 검찰이 직접 수사를 해야 한다”며 “검찰은 이탈리아 공정거래위원회의 정밀검사 보고서, 미국 내 연구소의 정밀검사 자료, 국내 언론사에서 실험한 아이폰 배터리 실험결과 보고서, 아이폰의 퍼포먼스와 배터리의 노후화와 관련한 데이터 분석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참작해 강력한 의지로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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