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세출의 자동차 개발자로 세계 최초 하이브리드차 개발…나치에 부역 했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어

 

퍼디난드 포르쉐 박사. / 사진=위키피디아

 

퍼디난드 포르쉐 박사만큼 자동차산업 역사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물다. 독일 자동차 업체 포르쉐를 설립하고 폴크스바겐의 근간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부역했다는 거센 비난도 따른다. 포르쉐 박사를 나치로 봐야 할지, 아니면 당시 시대 상황에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다만 포르쉐 박사가 불세출의 자동차 공학자이자 기술자였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평가다.

 

포르쉐 박사는 1875년 마퍼스도어프(현재 체코지역)에서 태어났다. 포르쉐 박사는 어려서부터 천재 특유의 비상한 재능을 보였다. 어린 나이에 직접 조명기구를 제작하기도 했으며 초등학교 이후 과정에서는 학교에서 직접 강의를 맡아 학생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또 이후 대학에서는 교육에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 일부 이론 강의를 제외하고는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포르쉐 박사는 189324세의 나이로 자동차 업체 로너베어켄에서 일을 시작한다. 로너베어켄은 당시 전기차 개발을 주로 하고 있었는데, 포르쉐 박사는 로너베어켄에서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 개발에 성공한다. 로너포르쉐로 불리는 이 차량은 당시로서도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포르쉐 박사는 1923년 다임러모터게젤샤프트(DMG)로 회사를 옮기며 슈트트가르트에서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DMG에서 임원직을 역임하며 자동차 개발 총괄을 맡는다. 이 시기에 독일어로 캐퍼라고 불리는 폴스크바겐의 비틀 초기모델 개발하고, 1926년부터는 다임러벤츠에서 S, SS 그리고 SSK등의 개발을 담당했다.

 

 

세계 최초 하이브리드자동차로 평가 받는 로너포르쉐. / 사진=위키피디아

포르쉐 박사는 1930년 자신의 이름을 딴 포르쉐란 회사를 직접 설립한다. 가족들이 지분의 70%를 갖고 있는 가족회사였으며, 나머지 지분 역시 친척 등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후 1934년부터 그의 행적을 놓고 끝없는 논란이 시작된다. 1934년 그는 히틀러의 압박을 받고 체코슬로바키아 국적을 포기하고 독일 국적을 선택하게 된다. 같은 해애 나치의 주문을 받아 차량을 대량 생산하게 되는데, 이 차량이 바로 폴크스바겐을 국민차 업체로 발돋움하게 만든 캐퍼다.

 

1937년에는 독일 나치당 당원으로 등록되며 나치당의 주요 인물로 올라선다. 틀러가 수여하는 독일 학문예술상을 받고, 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에 필요한 차량과 탱크를 생산 하는 등 주요 임무를 맡게 된다. 히틀러의 총애를 받으면서 전쟁 당시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점점 더 나치 당 주요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상황은 180도 뒤바뀐다.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게 되는데, 당시 지역을 점령하던 프랑스 군이 포르쉐 박사를 체포하고 22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한다.

 

19478월이 되어서야 감옥에서 풀려나는데, 이미 그의 여생은 이미 얼마 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포르쉐 박사는 3년 뒤 1951년 슈트트가르트에서 7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무덤은 현재 오스트리아 쩰암제에 위치하며 그가 살면서 이뤘던 업적들은 슈트트가르트 포르쉐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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