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범 수첩·캐비닛 문건·정유라 증언 놓고 공방 치열…'묵시적 청탁'에 대한 재판부 판단도 주목

433억원의 뇌물 공여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고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49)의 재판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제출된 핵심 증거들이 유·무죄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쏠린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증거물로 제출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과 청와대 캐비닛 문건 등이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문제 등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청탁한 핵심 증거물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삼성이 말 지원 사실을 숨기려 했다’는 취지의 정유라씨의 법정 증언은 부정한 청탁의 대가를 의심할 강력한 증거로 떠올랐다.

반면 이 부회장 측은 특검팀이 제시하는 증거들이 ‘간접증거’에 불과해 범죄입증이 완전하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함께 기소된 삼성 관계자들 역시 이 부회장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면서 재판의 끝을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최순실 뇌물' 관련 49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17.8.1 / 사진=뉴스1


◇ ‘정황증거’ 된 안종범 수첩…‘부정한 청탁’ 해석은 제각각

이 부회장의 뇌물 사건은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문제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문제, 삼성생명의 지주사 전환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에게 ‘부정한 청탁’을 했는지 ▲삼성이 최씨 일가를 지원한 것을 ‘뇌물’로 볼 수 있는지 ▲이 부회장이 이 과정에 얼마나 개입했는지 등으로 요약된다.

특검 측은 이 부회장의 ‘부정한 청탁’을 증명하기 위해 안 전 수석의 업무수첩을 증거로 제출했다. 박근혜 정부의 사초(史草)로 불리며 ‘청와대-보건복지부-국민연금공단-삼성’의 연결고리를 입증할 핵심 증거로 기대를 모았던 업무수첩은 그러나 끝내 직접증거가 아닌 정황증거로 채택됐다.

정황증거란 범죄사실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추측하게 하는 증거로 재판부가 당시 정황을 가늠할 간접 자료 성격으로만 증거 능력이 인정된다. 수첩에 기재된 메모, 즉 ‘삼성 엘리엇 대책’ ‘M&A 활성화 전개’ ‘소액주주권익’ ‘글로벌스탠다드’ ‘대책지속 강구’ 내용들이 간접적 자료 성격으로만 인정된 것이다.

재판부의 이 같은 결정은 수첩이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 사이의 독대 내용이 그대로 담겼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에 기인한다. 안 전 수석이 두 사람의 독대에 참석해 내용을 받아 적은 게 아니라, 사후에 박 전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는 것이다. 안 전 수석 역시 지난달 4일 증인으로 출석해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이라면서 “실제 대통령이 어떤 대화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고 증언했다.

이를 두고 양측의 법조계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전해 들은 내용을 받아 적는 과정에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부정한 청탁’의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로는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삼성 측도 이 같은 해석 아래 ‘직접 증거는 하나 없고 추측과 정황에 의한 주장’이라고 맞서고 있다. 안 전 수석이 증인으로 출석해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과 관련해 박 전 대통령이 지시를 내린 사실이 없다”고 진술한 점도 이 부회장에게 유리한 부분으로 해석된다.

반면 채택된 증거물의 내용에 집중해야 한다는 판단도 있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 한 변호사는 “증거의 직·간접성보다 증거가 설명해주는 내용을 봐야한다”면서 “법관이 합리적 의심 없이 청탁이 있었다고 확신을 가질 정도가 된다면 유죄의 증거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뇌물범죄는 은밀함이 특징이고, 법관은 직접증거와 간접증거를 종합해 판단한다”면서 “채택된 증거물이 간접증거물인가 직접증거물인가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특검팀은 수첩이 증거로 채택됐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강력한’ 간접증거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특검팀 관계자는 “대통령은 재벌 총수를 공식 행사가 아닌 은밀하게 개별적으로 만났다”면서 “‘부정한 청탁은 명시적인 의사 표시에 의한 것은 물론 묵시적 의사 표시에 의해서도 가능하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고 전했다.

 

'비선실세'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가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말 세탁' 등 뇌물공여 혐의 관련 39회 공판에서 증인 출석을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2017.7.12 /사진=뉴스1


◇ 삼성의 정유라 승마지원은 뇌물?…정씨 증언 두고 설왕설래

이 부회장의 433억원에 달하는 뇌물 혐의 중 213억원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의 승마지원과 관련된 금액이다. 특검은 이 부회장 등이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 등 승계 작업을 도와달라는 부정한 청탁의 대가로 최씨가 지배하는 독일 소재 페이퍼컴퍼니인 코어스포츠에 213억원을 지급하기로 약속하고 이 중 77억9735만원을 실제 지급했다고 판단했다.

삼성이 승마사업을 통해 정씨를 지원했다는 것은 이 부회장 측도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뇌물’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특검 측은 삼성이 정씨에게만 승마지원을 했기 때문에 뇌물에 해당한다는 입장이고 삼성 측은 “정씨만 지원하려던 것이 아니다”라고 맞서고 있다.

이에 관련 정씨는 이 부회장 측에 유리한 증언을 했다. 지난달 12일 최순실씨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씨는 “삼성에서 나를 단독지원한다고 들은 적이 없고, 다른 선수들과 함께 지원한다고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다른 선수들이 오면 내가 타고 있던 말 살시도를 다른 선수에게 줄까 봐 어머니에게 다른 선수들이 언제 오는지 여러 차례 물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명마 살시도의 이름을 바꾸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은 이 부회장에게 불리한 증언이었다. 정씨는 “살시도의 이름을 살바토르로 바꾸게 된 것은 삼성에서 이름을 바꾸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며 “어머니가 ‘삼성에서 이름을 바꾸라고 한 것이니 토 달지 말고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어머니가 ‘공주승마’로 문제가 됐던 내가 삼성이 소유주인 말을 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문제가 될 것이라며 화를 냈다"고 말했다. 이는 적어도 최씨가 삼성의 단독지원을 사실을 감추려 했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정씨는 또 최씨가 명마 살시도를 ‘네 것처럼 타면 된다’고 말했다고도 폭로했다. 이를 두고 특검 측은 “최씨의 발언은 삼성이 말의 소유권을 넘겼다는 증거”라며 “삼성이 말의 이름을 바꾸라고 한 것도 증거를 감추려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삼성 측은 ‘다른 선수들과 함께 지원한다고 들었다’는 정씨의 발언을 강조하며 삼성이 정씨를 콕 집어 지원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밖에 이 부회장은 삼성 측이 최씨 일가에 220억여원을 추가로 지원한 부분에 대해서도 관련성을 부인한다. 이 부회장 측은 뇌물 성격으로 삼성이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영재센터)와 미르·케이스포츠 재단에 지원 220억여원을 지원했다는 공소사실에 대해 ‘이 부회장은 전혀 관여한 바 없다’는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영재센터를 두 차례 지원한 결정은 임대기 제일기획 사장과 최지성 미래전략실장 등이 결정했다는 것이다. 영재센터를 운영한 이규혁 전 국가대표 스케이팅 선수는 증인으로 출석해 “영재센터에서 전무이사로 일했지만 최순실의 존재나 그가 센터와 연관돼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특검 측은 ‘묵시적 청탁’이라는 개념을 내세웠지만, 이 부회장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자 한발 물러선 모습이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묵시적 청탁이란 양측이 묵시적이고 암묵적으로 청탁이 오갔다고 볼 수 있는 경우 혐의가 인정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뇌물을 주고받는 범죄에서 청탁을 드러내놓고 하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묵시적 청탁을 인정하는 판례들이 있다”면서도 “이 부회장의 사건에 묵시적 청탁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지는 법관의 재량이 달렸다”고 설명했다. 

 

지난 7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발견된 박근혜 정부의 기록물들을 국정기록비서관실 관계자가 14일 오후 청와대 민원실에서 대통령기록관 관계자에게 이관하고 있다. 이날 오후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긴급 브리핑을 열고

 

◇ 재판 막판 등장한 캐비닛 문건​…“강력한 간접증거”


청와대에서 발견된 캐비닛 문건은 재판 막판 변수로 떠올랐다. 앞서 청와대는 지난달 14일과 17일 민정수석실과 국정상황실에서 발견했다며 박근혜 정부 문건을 일부 목록을 공개했다.

이 중 삼성 경영권 승계 관련 문건도 발견됐다. 청와대는 민정수석실에서 발견된 문서에 ‘삼성 경영권 승계국면에서 삼성이 뭘 필요로 하는지 파악’ ‘도와줄 것은 도와주면서 삼성이 국가경제에 더 기여하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모색’ ‘삼성의 당면과제 해결에는 정부도 상당한 영향력 행사 가능’ 등의 내용이 있다고 밝혔다. 국정상황실 문건은 더욱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적법하지 않아 보이는 지시사항을 포함해 매우 적나라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특검 측은 지난달 21일 캐비닛 문건 중 16건을 추가증거로 제출했고, 재판부도 이를 증거로 받아들였다. 당시 특검 측은 “이 문건은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실의 행정관이 작성, 출력해 보관한 문건으로 청와대에서 제출받은 문건”이라며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시 이 부회장, 삼성의 현안을 인식하고 정부가 지원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강조했다.

삼성 측은 간접·정황 증거에 불과하다며 확대해석을 피했지만 간접·정황 증거만으로 뇌물죄 판단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만만치 않다.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뇌물사건에서 직접 증거는 나오기 힘들고 간접증거의 양과 질에 따라 유무죄가 갈린다”면서 “안종범 수첩과 함께 강력한 간접 증거로 받아들여질 것 같다”고 내다봤다. 경기도 지역의 한 변호사 역시 “삼성의 현안을 정부가 파악해 지원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은 이 부회장에게 불리한 내용들”이라며 “재판부가 증거물로 해당 문건들을 증거물로 채택한 이상 판결에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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