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내수 최하위 추락…볼륨신차 없어 하반기 반등도 불투명
르노삼성자동차의 놀이터에 발길이 끊겼다. 터는 그럴듯하게 닦아놨는데 고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고객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하겠다던 박동훈 사장의 당초 포부가 무색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박 사장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놀이터론(論)’의 핵심은 남들과 다른 놀이기구다. 현대·기아차가 독점해오다시피 한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르노삼성 만의 차별화된 모델로 고객을 유입한다는 게 요지다. 하지만 처음 호기심에 찾던 이들도 매일 같은 놀이기구에 이내 질린 모양새다. 더 이상 색다른 재미도 없는 놀이터에 흥미를 느끼고 머무를 고객은 없다.
르노삼성은 지난해 강력한 신차 효과로 내수 3위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판매량을 늘렸지만, 올 상반기 다시 최하위로 주저앉았다. 믿었던 6시리즈가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아든 게 부진의 가장 큰 이유다. 하반기 반등을 위해 꺼내들 카드에도 볼륨 신차는 눈에 띄지 않는다. 섣불리 반등을 장담하기도 힘든 상황인 셈이다.
박동훈 사장이 단 기간의 성취에 취해 재도약의 문턱에서 제대로 된 경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경계의 목소리가 불거지는 이유다.
박동훈 사장은 지난해 3월 취임 일성으로 “국내에서 르노삼성 만의 놀이터를 만들어 소비자가 폭 넓은 선택을 할 수있는 시장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장담한 바 있다.
실제 박 사장은 과거 수입차 업계에서 쌓은 영업 수완을 십분 발휘, 지난해 기존 중형세단과 차별화된 고급화 전략을 앞세운 SM6로 쏘나타가 독점해 온 시장 판도를 뒤흔들었다. 바통을 이어받은 QM6도 싼타페와 쏘렌토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로 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시장에서 점유율을 늘리며 지난해 내수판매 목표를 11% 초과 달성하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현대·기아차 일색의 국내 자동차시장에서 르노삼성 만의 고유 영역을 구축하겠다는 박 사장의 놀이터론이 현실화 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도 나왔다.
하지만 시장의 기대는 우려로 반전했다. 르노삼성은 올 상반기(1~6월) 국내 시장에서 5만2882대를 판매했다. 같은 기간 5만3469대를 팔아치운 쌍용차에 밀려 다시 내수 꼴찌의 불명예를 안게 됐다. 박동훈 사장 취임 1년여 만에 다시 제자리로 회귀한 셈이다.
월별 판매량도 둔화되는 추이다. 르노삼성의 지난달 판매량은 전년동월 대비 16.5% 줄어든 9000대다. 전월 대비로도 2.4% 빠졌다. 올 들어 3월(1만510대)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1만대 판매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달 수입차 판매 선두인 메르세데스-벤츠(7783대)와의 판매량 격차도 1천여대 수준에 불과하다. 국내 완성차업체가 수입차업체에 월간 판매량을 따라잡히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르노삼성이 연초 잡은 12만대 내수판매 목표 달성도 불투명해졌다. 한국GM을 잡고 국내 완성차업계 3위로 도약하겠다는 박 사장의 청사진도 공수표로 전락할 위기다.
◇ 놀이터 주역 SM6·QM6·QM3 동반 부진
사실 르노삼성의 내수 감소는 어느 정도 예상돼 왔던 일이다. 일부 모델이 차지하는 판매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탓이다. 지난해 SM6, QM6 두 6시리즈를 합친 판매량은 총 7만1604대로 르노삼성 전체 내수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이 60%를 넘는다. 여기에 소형 SUV QM3(1만5301대)를 더하면 세 모델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에 육박한다.
상반기 볼륨모델 SM6의 판매량은 2만3917대로 전년동기 대비 12.1% 빠졌다. 선두 쏘나타와의 판매량 격차도 1만8000여대가량 벌어졌다. 한 때 쏘나타의 아성을 위협했던 기세는 간 데 없다. QM6 역시 판매 감소세가 뚜렷하다. 지난해 3500여대에 달했던 월간 판매량이 올 들어서는 2천300여대로 30% 이상 급감했다. 지난달에는 2천155대가 팔리는 데 그치며 2천대 판매에도 간신히 턱걸이 했다. 지난해 돌풍을 일으켰던 6시리즈의 신차 효과가 힘이 다한 모양새다.
월평균 2000~3000대가량이 꾸준히 팔려나가며 르노삼성 재도약의 첨병 역할을 맡았던 QM3도 올 들어서는 월간 1000대 수준으로 판매 규모가 급감했다. 공교롭게도 박동훈 사장이 국내 시장에서 새로운 놀이터를 만들었다고 자부한 3개 차종 모두가 동반 부진에 빠진 셈이다.
QM3는 2014년 출시 이후 별다른 모델 체인지 없이 색상만 추가해왔다. 르노삼성은 하반기 QM3의 부분변경(페이스리프트) 모델을 국내에 투입, 경쟁이 심화되는 시장 환경에 대응한다는 계획이다.
박동훈 사장 역시 지난달 15일 자동차의 날 행사에서 “타사의 소형 SUV 모델들과 QM3는 스타일이 다르다”면서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기보다는 QM3 만의 장점을 알려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변화된 시장을 이해하지 못한 안이한 대처라는 지적이다. 현재 소형 SUV 시장은 쌍용차 티볼리가 선두 입지를 강화하고 있는 데다, 현대차 코나와 기아차 스토닉이 새로 가세하며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응책으로 내놓을 QM3 부분변경 모델은 실내외 디자인만 일부 변경됐을 뿐, 성능은 크게 개선된 점이 없어 향후 회복세를 점치기도 녹록치 않다는 게 업계 관측이다. 최고 장점으로 부각됐던 ℓ당 17.7㎞에 달하는 QM3의 연비도 스토닉(17.0㎞/ℓ), 코나 (16.8㎞/ℓ) 등 신형 모델이 나온 시점에서 크게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
르노삼성 입장에서는 기대했던 QM3 신차 효과가 현대차 코나에 잠식당할 가능성도 높다. 브랜드 최초로 소형 SUV시장에 뛰어드는 현대차가 코나의 초반 시장 장악력 강화를 위해 공격적인 판촉에 나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르노삼성의 경우 SM6, QM6, QM3에 대한 판매 의존도가 매우 높은 편”이라면서 “SM6와 QM6의 신차효과가 한 풀 꺽인데다, QM3가 속한 소형 SUV시장에서의 경쟁 격화도 심화되는 등 이들 세 차종이 부진에 빠질 경우 전체 실적이 하락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 해치백 무덤 뛰어드는 클리오, 될까?
실적 반전을 위해 9월 출격이 예고된 소형 해치백 클리오의 전망도 낙관하기 힘들다.
박동훈 사장은 지난달 기자들과 만나 “클리오를 연내 4000~500대 정도 판매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면서 “무채색 위주의 국내 자동차 시장에 다채로운 컬러의 클리오를 들여와 컬러 마케팅으로 해치백 시장을 공략하겠다”고 밝혔다.
박 사장은 특히 “현대차가 신형 i30를 출시하면서 강력한 마케팅 전략을 펼치지 않아 해치백 시장이 성장하지 못했다”며 “한국 시장은 ‘해치백의 무덤’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마케팅 활동 등에 총력을 펼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업계에서는 박 사장이 시장 상황을 오판, 판매 전략의 방향타를 잘못 설정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시장에서의 해치백 부진은 단순히 차량 성능이나 마케팅 부족에 기인하지 않는다는 게 업계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국내 해치백 시장은 폴크스바겐 배출가스 인증 서류 조작 파문으로 지난해 7월 골프 판매가 정지된 이후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현대차가 골프의 빈 틈을 노리고 성능 강화와 일부 트림 가격 인하, 판촉 강화 등으로 무장한 3세대 i30를 선보였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현대차 i30는 지난해 국내 시장에 완전변경(풀체인지) 모델을 투입하고도 2441대 팔리는데 그쳤다. 올 들어 가수 아이유와 배우 유인나까지 새 광고모델로 기용하고 시승시 50만원 추가 할인 등 파격적인 판촉을 진행하며 판매 확대를 기대했지만 상반기 판매량은 2222대에 불과하다. 이처럼 국내에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i30는 유럽과 호주 등 해외시장에선 좋은 실적을 거두고 있다.
업계는 해치백의 국내 부진에 대해 ‘실용성만 강조된 못생긴 짐차’라는 국내 소비자들의 인식과, SUV 열풍으로 해치백 시장 수요가 위축된 점을 가장 큰 걸림돌로 분석하고 있다. 박 사장이 밝힌 컬러 마케팅 만으로는 클리오의 성공을 예단하긴 부족하단 얘기다. 게다가 클리오는 우선 디젤 모델만 국내 수입될 예정이다. 정부가 경유차 수요 억제 정책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점도 잠재적인 악재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
익명을 요구한 A사 관계자는 “박동훈 사장이 2005년 폭스바겐코리아 초대 사장에 오른 뒤 해치백 골프를 국내 시장에 들여와 돌풍을 일으킨 바 있다”면서도 “당시와 다른 시장 상황은 물론 브랜드 차이 등 여러가지 주변 요건을 간과하는 듯 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박 사장은 지속적으로 현대차 해치백 마케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회사 규모 등을 감안하면 르노삼성이 현대차를 능가하는 마케팅 역량을 투여할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