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제작현장 착취적 노동구조부터 바꿔야…재발방지 약속보다 법적 뒷받침 절실
지난해 10월 CJ E&M 소속 케이블방송 tVN의 ‘혼술남녀’의 조연출로 일하던 이한빛 PD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에 대해 14일 CJ E&M이 8개월 만에 사과했다. 하지만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법제도적 개선책이 필요다는 목소리가 높다.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 측은 방송 현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근로시간 자체를 줄여나갈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 이한빛 PD의 친구 박수정씨는 “노동을 착취당하는 이가 누군가의 노동을 착취해야 하는 폭력적인 구조를 바꿔나가는 게 친구(고 이한빛 PD)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 PD는 지난해 10월 실종 5일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유서에서 힘없는 비정규직 스태프들을 격무속으로 몰아대고 쥐어짜는 현실이 괴롭다고 적었다. 이 PD는 본인도 격무에 시달리는 와중에 스태프들에게 장시간 근로를 지시하고 계약직 스태프들의 정리해고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대책위 측에 따르면 이 PD 본인도 드라마 촬영 55일동안 이틀 밖에 쉬지 못했다고 한다. 대책위가 통화내역 등을 토대로 추정한 결과 이 PD는 지난해 8월27일부터 실종 전날인 10월 20일까지 단 이틀만 쉴 수 있었다. 같은기간의 발신통화 건수(1547건)를 볼 때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4~5시간에 불과했다.
이처럼 한류로 일컬어지는 문화산업의 뒷면에는 장시간 노동, 계약직 스태프들이 자리하고 있다. 모든 게 돈 때문이었다. 드라마 하루 촬영비용은 수천만원이다. 제작사는 하루 안에 최대한의 촬영이 진행될 수 있도록 압축적으로 일을 진행하고 일을 맡은 스태프들은 이 일정에 맞춰 강행군을 해야 한다. 촬영 현장에는 한 번에 적게는 30~40명, 많게는 100명 가량의 스태프가 참여한다. 하루 촬영은 24시간을 기준으로 이뤄지며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아 초과 시간이 발생하면 그만큼 인건비가 지출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적은 비용으로 고효율을 올리기 위해 제작진의 희생이 강요되는 일이 되풀이된다는 지적이다.
이에 CJ E&M은 이한빛 PD가 목숨을 끊은 지 8개월 만인 지난 14일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재발 방지대책을 내놨다. 김성수 CJ E&M 대표이사는 “고인의 사망 이후 미숙한 대응으로 유가족의 아픔을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회사의 책임자로서 왜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생겼는지 무거운 마음으로 성찰과 고민을 했다. 젊은 생을 마감한 고인과 유가족께 깊은 애도를 표하며 대책위와 깊은 관심으로 저희를 지켜봐주신 많은 분들의 말씀과 질책에 귀 기울여 환골탈태의 심정으로 시스템 개선에 임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밝혔다.
이날 공식 간담회에서 CJ E&M은 ▲책임자 징계 ▲회사 차원의 추모식 ▲이한빛PD 사내 추모편집실 조성 ▲고인의 뜻을 기릴 수 있는 기금 조성에 관련된 재정적 후원 등을 약속했다. 또한 방송 제작환경과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제작인력의 적정 근로시간 및 휴식시간 등 포괄적 원칙 수립 ▲합리적 표준 근로계약서 마련 및 권고 등 9가지 개선과제를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대책위는 CJ E&M과 함께 추후 개선사항의 이행여부를 확인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방송계의 노동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기까지는 법제도적 개선책이 추가로 필요할 전망이다.
앞서 언론노조 관계자는 방송계 노동환경에 대해 “더 이상 방송사업자들의 노동관계법 위반 행위에 대해 눈 감아서는 안 된다”며 “파견, 도급, 용역, 기간제, 단시간알바, 프리랜서 등 온갖 비정규직 넘쳐나 ‘비정규직 박물관’으로 불리는 방송 콘텐츠 노동현장을 근본적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 장시간 노동과 상명하복 체제로 사람을 쥐어짜는 관행을 타파해야 한다"며 방송계의 부당한 노동관행에 대해 밝혔다.
전진희 청년유니온 기획팀장은 15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금껏 방송업계의 노동환경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방송계는 한 번도 노동환경 개선방안을 내놓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CJ E&M의 사례가 모든 방송사로 확대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진희 팀장은 가장 큰 문제점으로 표준근로계약서 미작성을 꼽았다. 전 팀장은 “근로기준법은 근로계약서에 임금, 노동시간, 4대보험 가입여부 등 모든 근무조건을 포함시키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방송계 종사자들은 계약서 자체를 쓰지 않고 일하는 등 근로기준법 위반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또한 “비정규직, 외주, 프리랜서 노동자들 중에는 방송사와 계약을 맺었는지조차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책위원회 측은 방송 현장에서 근로기준법이 준수되고, 모범 사례들이 확산되도록 방안을 찾고 있다”며 “우선 제도차원에선 과도한 근로시간을 제한해야 하고, 모든 방송사로 확대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 방송계 관리감독, 방송산업 관련한 연구를 진행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또한 “정리가 끝나는 9월 쯤 정부와 국회에 개선책을 요구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