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보사 백기투항으로 논란 일단락…전문가들 "제재 피해 항복한 것일뿐 재발 여지 봉쇄해야"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 지급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삼성·한화·교보생명 보험사와 금융감독당국 간 분쟁은 생보사의 보험금 전액지급으로 일단락 됐다.
하지만 생보사의 백기투항은 금융감독원의 중징계에 따른 결과다. 금융소비자연맹 등 보험관련 소비자단체들과 보험법 관련 전문가들은 차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고객의 신의를 위해 보험금 지급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금융당국 중징계를 피하기 위해 내린 결단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에 보험법 관련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보험사가 정당한 이유 없이 약관을 어기면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행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근 자살보험금 논란이 어디에서 시작해 최근 마무리됐는지 짚어본다.
◇자살보험금, '자살은 재해가 아니다' 분쟁에서 '소멸시효 논쟁'까지
보험사는 보험 계약자가 사망하는 경우 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 재해로 인해 사망한 경우, 계약자가 특약에 따라 재해사망보험을 들어놨으면 재해사망보험금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 보통 재해사망보험금은 일반 사망보험금보다 2배, 많게는 5배가량 많다.
문제는 2001년부터 2010년 약관 변경 전까지 팔려나간 약 280만건의 보험이다. 당시 생보사들이 2010년 4월 이전에 판매한 재해사망특별계약 상품 약관에 '가입 2년 후 자살 시에도 특약 보험금을 지급한다'고 명시하고 이 상품을 고객에게 팔았다. 하지만 재해란 외부에 기인한 우발적인 사고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자살이 재해가 아니라는 점을 이유로 생보사는 재해사망특약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고 일반사망보험금만 지급했다.
이 약관은 만들어질 당시 보험사가 일본 보험사의 약관을 잘못 번역해 재해사망특약에 자살을 포함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감원은 2001년 보험사가 이 약관을 작성하고 보고할 때 이에 대한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고 승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의 생보사는 금감원 승인에 따라 이 약관을 그대로 가져다 똑같이 사용했다.
약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2007년 즈음해 민원이 제기되면서 나타났다. 금감원은 2010년이 돼서야 문제 약관을 수정하도록 했다. 보험업계도 뒤늦게 약관 작성에 실수가 있었다고 판단해 이 약관을 수정한다. 문제는 이러한 수정이 이뤄지기 전부터 민원이 들어왔음에도 생보사들은 자살한 고객의 가족들에게 재해특약에 따른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일반사망보험금만 지급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생보사 관계자는 "당시 약관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몰랐고 문제를 인지한 후에도 자살은 재해가 아니라고 확신했다"며 "실수로 만든 약관 자체가 무효"라고 약관이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민원 발생으로 금감원이 조사에 나서면서 ING생명 등에 약관에 명시된 대로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생보사들은 반발하면서 소송전으로 맞대응했다. 당시 생보사가 주장한 것은 '자살은 재해가 아니다'라는 점이다. 반대로 금감원과 금융소비자단체는 '자살이 재해가 아니든 상관없이 약관에 적힌 대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보험 계약자들이 제기한 소송이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지난해 5월 대법원은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실수로 만든 약관 자체가 무효이며 자살로 인한 재해사망보험금은 지급할 이유가 없다'고 버틴 보험사에 약관에 기재된 대로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이 맞다고 내린 판결이었다.
이후 생보사들은 "청구 기간 2년이 지난 자살보험금은 소멸시효가 완성돼 지급할 필요가 없다"고 맞서기 시작했다. 대부분 보험금 지급을 두고 소송을 벌이는 동안 보험금 청구기간이 2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당시 미지급 자살보험금 2465억원 가운데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은 2003억원으로 81%에 달했다
보험소비자 단체 관계자는 "처음 논쟁은 생보사가 자살이 재해가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고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생보사는 약관에 이런 내용이 기재된 것을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보험 계약자는 이 점을 약관이 수정되기 전부터 문제를 제기했다"며 "이 문제가 법원 다툼으로 커지자 보험사는 '자살은 재해가 아니다'로 일관된 주장을 했다. 대법원이 소비자 손을 들어주면서 생보사는 이때부터 소멸시효 경과를 들고나왔다"고 말했다.
결국 생보사는 소멸시효를 이유로 한 법정 싸움을 벌였다. 지난해 9월 말 대법원은 교보생명이 고객 A씨를 상대로 낸 채무부존재 확인소송 상고심에서 "보험사가 자살보험금을 주기로 특약을 체결했더라도 소멸시효가 지나도록 가입자가 이를 청구하지 않았다면 주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을 내놨다. 보험청구권 소멸시효 2년이 지났기 때문에 지급 의무가 없다는 판결이다.
대법원에서 소멸시효가 지난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 판례가 나오자 생보사는 금감원이 보험금 지급을 강제할 행정명령을 내리기는 힘들게 됐다고 판단했다. 이 일로 자살보험금 지급 문제는 끝났다는 게 당시 보험업계 시각이었다.
◇"대법원도 인정한 소멸시효 지난 자살보험금 지급하면 배임에 걸린다?"
이후 금감원은 이 사안에 연루된 14개 생보사 모두에 대해 보험업법 위반으로 과징금 이상의 행정제재를 내리는 방안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금감원 보험준법검사국 관계자는 "보험사가 약관을 지키지 않고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험업법 127조에 명시된 기초서류 준수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며 보험금을 미지급한 생보사에 대해 행정제재를 예고했다.
소비자와의 신뢰를 지켜야 한다는 게 금감원의 주장이었다. 이에 신한·하나·DGB·메트라이프·흥국·PCA생명 등 중소형사는 곧바로 백기를 들었다. 미지급한 자살보험금 액수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금감원과 부딪히면서까지 보험금을 논란을 가지고 갈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ING생명은 소멸시효와 상관없이 837억원(이자 포함)을 모두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알리안츠생명도 이를 보고 자살보험금(지연이자 포함) 137억원을 전액 지급하기로 하며 뒤늦게 백기를 들었다.
남은 건 삼성, 한화, 교보 등 '빅3' 생보사였다. 금감원은 일부 정지와 인허가 취소(이상 기관제재), 최고경영자 문책경고와 해임권고(이상 임직원 제재) 등 유례없는 중징계를 예고했다.
다른 생보사들은 금감원으로부터 과징금이라는 경징계만 받고 이 일을 털어내자 빅3 생보사 사이에선 복잡한 셈법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배임죄'다.
빅 3 생보사는 '대법원이 판결까지 한 지급할 이유가 없는 보험금을 지급하면 배임죄에 걸린다'로 맞섰다. 당시 빅3 중 한 보험사 관계자는 "우리도 보험금을 내고 싶지만 대법원이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 보험금을 내게 되면 주주에 의한 배임죄에 걸리게 된다"며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설명했다.
금감원 보험준법 검사국 고위 관계자는 "당시 보험사 임원이 만나자고 해서 만난 적이 있다"며 "이 임원이 '우리도 어쩔 수 없다. 우리 사정을 이해해달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시서저널이코노미 취재 결과 생보사 제기한 배임죄 주장은 법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나라 상법상 주주가 대표 이사 등 경영진에 배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삼성생명 등 빅3 생보사가 잘못된 판단에 기초해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버티기에 나선 것이다 .
장덕조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은 "주주가 이사에 대해 책임을 추궁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라며 "상법 401조는 '이사는 제3자에 대해 연대해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주주가 제3자에 포함되는지 여부가 중요하다. 주식 같은 간접손해의 경우 주주 제외설이 정설이다"라고 설명했다.
판례도 "대표이사가 회사 재산을 횡령해 회사 자산이 줄어 회사가 손해를 입고 결과적으로 주주의 경제적 이익이 침해되는 간접적인 손해는 상법 401조 1항에서 말하는 손해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장 원장은 이어 "소수 주주가 대표 소송으로 회사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법조계는 경영자의 판단을 두텁게, 넓게 그 범위를 인정하고 있다"며 "특히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이 회사 장래에 유익하다고 판단을 내렸는데 어떤 점이 회사에 손해를 끼쳤는지 소주주들이 입증하기 대단히 어렵다"고 말했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도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이 배임이 아니다"라며 "지급하지 않아 계속 발생하는 지연이자로 인한 회사 손해를 생각하면 주주들이 경영진에 보험금 미지급을 이유로 소송을 걸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삼성생명 관계자는 "민법상 배임 문제를 말한 게 아니었다"며 "형법상 배임은 누구라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을 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한 보험업 관련 전문가는 "자살보험금을 지급했다는 이유로 생보사를 형법상 배임으로 고발할 경우 검찰이 받아들일지도 의문"이라며 "자살보험금 지급은 위법한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금감원 중징계로 빅3 "전액 지급" 결정…전문가 "소비자 피해 막기 위해선 제도 변경 필요"
결국 법적 근거를 상실한 삼성·한화·교보생명 등 빅3 생보사는 자살보험금 미지급을 버티다 결정적으로 금감원의 중징계 발표로 전액 지급 백기 투항을 하게 된다.
금융감독원이 지난달 23일 제재심의위원회에서 △과징금 최대 8억9000만원 △대표이사 문책경고 △일부 영업정지 최대 3개월 등의 중징계를 내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교보생명이 빅3 가운데 최초로 일부 지급 의사를 밝혔다. 오너인 신창재 회장이 최고경영자(CEO)로 있어 대표이사 문책 경고만은 피해야 한다는 의견이 결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급 기준은 2011년 1월 24일 이후의 청구 건이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이 시기를 잡은 것과 관련해 "금감원이 보험사의 기초서류 작성 위반으로 징계를 내릴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시점이 2011년 1월 이후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생명도 전액 지급을 결정했다. 금융위가 금감원의 제재안을 확정하면 김창수 삼성생명 사장 연임이 불가능해져 경영 공백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기존에 전액 지급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일부만 지급하겠다고 했다가, 최근 금감원의 제재로 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으로 결정했다.
삼성생명까지 전액 지급으로 선회하자 한화생명도 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하기로 했다. 한화생명은 자살보험금 지급과 관련한 긴급 안건을 지난 3일 이사회에 상정해 전액지급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고객과의 신뢰보다 징계안에 따라 지급 결정을 내렸다는 비난이 제기된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고객과 소송으로까지 갔던 보험사다"라며 "고객과의 신의를 저버렸기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12년간 이어졌던 자살보험금 논란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법학계에선 이런 일이 과거에도 많았다며 보험사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진국과 같이 보험사가 정당한 이유 없이 보험금 지급을 거부할 경우 징벌적으로 원 보험금에 3배에 해당하는 보험금을 내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또 소멸시효도 현 3년에서 5년으로 늘려야 하고 소멸시효 발생 시점도 유럽 선진국처럼 '고객이 보험금을 받아야 하는 것을 안 때로부터' 소멸시효가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장덕조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은 "우리나라 소멸시효 기간은 선진국보다 짧다"며 "사고 발생 시점을 소멸시효 시작점으로 삼고 있어 고객에게 불리하다. 소멸시효 기간을 늘리고 '고객이 사건을 안 때로부터' 소멸시효가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보험 선진국이 취하고 있는 방향에 맞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