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몸통은 김기춘”…문화계 “유 전 장관 재임 때는 금도 넘지 않아”
박근혜 정부의 초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유진룡(61) 전 장관의 이름이 화두가 됐다. 그가 특검 사무실에 출석하며 토로한 문화농단의 실체 때문이다. 이후 온라인을 중심으로 그의 발언을 둘러싼 반응이 뜨겁다. 문화계 내에서는 유 전 장관 재임시절 문화행정이 금도를 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실제 그의 면직을 기점으로 블랙리스트 등 문화농단이 본격화했다.
23일 유진룡 전 장관이 서울시 대치동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 전 장관이 기자들 앞에 선건 국정농단 정국 이후 처음이다. 그는 그간 진행된 청문회에도 나서지 않았었다.
이날 그는 작심한 듯 여러 장의 메모지를 준비해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대해 아는 바를 쏟아냈다. 기자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시간만 20분에 달했다.
그는 “나와 (문체부) 동료‧후배들이 목격하고 겪은 모든 정보를 취합해볼 때 분명 김기춘 씨가 (블랙리스트를) 주도했다. 그 분 취임 후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블랙리스트 몸통이 김기춘 전 실장임을 분명히 했다.(관련기사: 유진룡 “김기춘 주도 블랙리스트 작성‧적용”)
이 소식이 보도된 후 온라인 공간의 반응은 뜨거웠다. 23일 밤늦게까지 유 전 장관의 이름은 주요 포털 검색어 상위권을 휩쓸었다. 이튿날인 24일 오전 현재도 그의 이름이 순위권에 올라 있다.
특히 23일 유 전 장관은 블랙리스트에 관여한 현직 문체부 관료들로부터 관련 자료를 건네받아 직접 특검에 제출했다는 사실도 알렸다. 박근혜 정부 국무위원 출신인 그가 직접 스모킹건(결정적 증거) 역할을 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까닭이다.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직 전면적으로 불거지기 전인 지난해 9월 기자가 접촉했던 한 진보성향 문화계 인사는 “유 전 장관 재임시기까지에는 (문화행정이) 선을 넘지 않았다. 내정 자체부터 의아한 인물로 꼽힌 후임 김종덕 전 장관 시점부터 크게 변했다”고 전했다. 이후 이 인사 역시 1만명에 달하는 블랙리스트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인사는 “문체부의 경우 이명박 정부 시기 문화계 좌파 척결로 난리를 피우지 않았나. 그러다 박근혜 정부에서 결국 왕따가 된 유진룡 전 장관이 그나마 자유주의적 성향으로 적절히 견제해왔다. 그런데 유 전 장관이 말을 듣지 않으니 내친 것 아닌가”라고 비판했었다.
그가 말한 자유주의적 성향은 예술인을 지원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대명제를 뜻한다. 진보성향 문화계 내에서도 유 전 장관이 이 대명제를 지킨 인물이라는 공감대가 있다는 얘기다. 실제 문화계 황태자로 불리며 문화농단의 핵심인물 노릇을 한 차은택(48) 씨는 유 전 장관이 면직된 후 문화융성위원으로 내정됐다.
하지만 박사모 등 박근혜 대통령 지지세력이 유 전 장관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다르다. 23일 유 전 장관의 폭로가 알려진 직후 박사모 홈페이지 등에는 유 전 장관을 비난하는 글들이 잇따르고 있다. 한 회원은 “블랙리스트는 어느 정권이나 있다. 왜 박근혜 정권에 그게 문제가 되나”라고 적었다. 박사모와 보조를 맞추는 정치인들의 시각도 비슷하다.
김진태(53) 새누리당 의원은 20일 부산역, 21일 서울 집회에 나와 “조윤선씨가 문체부 장관할 때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고 수사한다. 박근혜정부에서 종북좌파 행위를 하는 사람들한테 국비까지 지원해야 되느냐”라고 말했다. 체제를 부정하는 예술가에게 지원금을 주지 않은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지난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블랙리스트 때문에 피해를 입은) 이윤택 연출가는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서 배제됐다기보다 본때를 보여주는 사례로 고른 게 아닌가. 박근형 연출가는 진보 성향이 아니다. (그런데) 연극 ‘개구리’로 박정희를 풍자한 게 결과적으로 대통령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