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는 CJ는 국가주의 짙어져…‘변호인’ NEW는 숨 고르다 '연평해전'
영화가 정국의 화두가 됐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과 국제영화제 출품작이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직접적 연결고리를 맺고 있다는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영화산업 종사자들과 증권사 영화 담당 애널리스트들은 배급사별 주력작을 ‘텐트폴’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텐트폴은 텐트를 칠 때 지지대 역할을 하는 버팀목이다. 한해 매출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리라는 기대가 섞여있는 비유다. 텐트폴은 7~8월 여름 성수기나 명절연휴, 겨울방학을 겨냥한다.
일부 메이저 투자배급사의 경우 박근혜 대통령 집권 후 텐트폴의 변화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2012년 ‘광해’와 2013년 ‘설국열차’를 연달아 흥행시킨 CJ E&M은 2014년부터 애국주의 성향이 짙은 영화를 성수기 텐트폴로 배급하기 시작했다. ‘변호인’을 배급했다가 혹독한 겨울을 난 NEW는 숨을 고르다 2015년 ‘연평해전’을 배급했다. 쇼박스는 제 갈 길을 갔다. 롯데엔터테인먼트는 무색무취했다.
19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강요미수 혐의에 대한 2차 공판준비기일이 열렸다. 조 전 수석은 이미경 CJ 부회장에 대한 사퇴압력 혐의를 받고 있다. 조 전수석측 변호인은 “(사퇴압력에 관한) 대통령 지시를 받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공모에 의한 협박은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피의사실 책임을 부인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직접적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셈이다.
박 대통령이 왜 집권 초부터 이미경 부회장을 물러나라 지시했는지 정확한 배경은 밝혀지지 않았다. 조 전수석도 이유는 모른다고 답했다. 재계와 문화계에서는 공히 이 부회장이 CJ의 문화관련 사업을 주도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스스로 ‘좌편향’이라 낙인찍은 콘텐츠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는 이 알레르기가 문서 형태로 바뀐 흔적이다.
영화산업계 일각에서도 이 알레르기를 뚜렷하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CJ E&M은 2013년 설국열차를 텐트폴로 내세웠다. 봉준호 감독이 연출하고 할리우드 스타배우 크리스 에반스와 송강호 등이 출연했다. 꼬리칸과 앞칸을 나눈 설정이 계급의 문제를 첨예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를 얻었다.
하지만 설국열차는 같은 해 런던한국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번복됐다. 이 사건은 검열정국의 포문을 연 계기로 꼽힌다. 앞서 CJ E&M은 대선을 앞두고 ‘광해’를 투자배급했었다.
이듬해부터 CJ E&M 텐트폴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다. 국가에 대한 충성, 산업화 시기 미화 등 국가주의 성향이 짙어졌다. 2014년 CJ E&M이 여름 성수기에 내놓은 영화는 ‘명량’이다. 결국 이 영화는 1760만 관객을 모으며 역대 흥행기록을 갈아치웠다.
겨울이오자 CJ E&M은 ‘국제시장’을 배급했다. 국제시장은 베트남전, 독일광부파견 등을 다루며 박정희 정권 시기를 미화했다는 논란에 휩싸였었다. 이 영화는 윤제균 감독이 연출하고 윤 감독이 직접 만든 회사 JK필름이 제작했다. 지난해 JK필름은 CJ E&M에 인수됐다.
두 영화에 대한 정권의 관심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2014년 12월 ‘영화 국제시장-보수, 애국’이라는 대목과 ‘국제시장 제작 과정 투자자 구득난, 문제 있어, 장악, 관장 기관이 있어야’라는 대목이 연이어 나온다. 명량과 국제시장에 대해 ‘고무’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했다. CJ E&M은 지난해 여름 텐트폴로 ‘인천상륙작전’을 내놨다.
NEW는 2013년 12월 18일 개봉한 ‘변호인’으로 혹독한 겨울을 맞았다. 변호인 개봉 이듬해에는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다. 2014년 텐트폴은 밀항자들과 한배를 탄 선원들 이야기를 다룬 ‘해무’다. 해무는 유력배우를 내세우고도 흥행에 참패했다.
숨을 고르던 NEW는 2015년 6월 24일 ‘연평해전’을 배급한다. NEW가 여름 성수기 끝물인 8월 20일 내놓은 ‘뷰티인사이드’가 제작비 65억원 안팎의 중·저예산 작품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연평해전이 텐트폴인 셈이다. 보수논객으로 잘 알려진 조우석 문화평론가는 당시 이 영화를 두고 “진실에 기초한 우파 영화란 콘텐츠가 되고도 남는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지난해 NEW는 여름 텐트폴로 ‘부산행’을, 겨울 텐트폴로 ‘판도라’를 내세웠다. 둘 다 당국의 무능을 꼬집는 영화다. 하지만 좀비와 원전 등 그간 나오지 않았던 주제를 다뤘다는 점이 더 눈길을 끌었다. 다만 판도라를 연출한 박정우 감독은 2016년 메시지가 “탈핵과 탄핵”이라며 분명한 정치적 견해를 피력했다.
오리온그룹 계열의 쇼박스는 별 다른 변화양상이 보이지 않았다. 쇼박스는 2013년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관상’을 텐트폴로 내세워 흥행시켰다. 다만 관상은 설국열차와 마찬가지로 같은 해 열린 런던한국영화제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가 번복됐다. 당시 영화계서는 변호인의 주연인 송강호가 출연한 점이 문제가 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교롭게도 설국열차에도 송강호가 나온다.
이듬해 여름 쇼박스는 ‘군도: 미란의 시대’를 내놨다. 2015년에는 ‘암살’로 일제치하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대립을 첨예하게 드러내 흥행홈런을 쳤다. 지난해에는 ‘터널’을 내놓아 당국의 무능을 꼬집었다. 터널은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킨다는 평도 있었다. 쇼박스는 마이웨이를 계속한 셈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는 무색무취한 4년을 보냈다. 2013년 ‘더 테러 라이브’와 2014년 ‘해적’은 흥행가능성이 높은 오락형 영화에 가깝다. 지난해 여름 텐트폴은 ‘덕혜옹주’였다.
업계 안팎에서는 정권이 식물상태에 빠지고 조기 대선이 다가오면서 텐트폴의 성격이 달라지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18일 한국콘텐츠진흥원도 올해 산업 10대 트렌드를 발표하며 그 중 하나로 정치물 인기를 꼽았다. 송진 한국콘텐츠진흥원 책임연구원은 “상실의 시대에 현실을 직시하는 시사다큐멘터리와 정치영화에 관심이 집중될 것”이라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변호인의 투자배급사 NEW가 탄핵 정국 후 처음 내놓는 텐트폴은 권력의 치부를 한껏 드러낸 ‘더킹’이다. 변호인은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가장 싫어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